데미안(오리지널 초판본 표지 디자인)
헤르만 헤세 지음, 김선형 해설, 이미영 옮김 l 코너스톤(2016)
올여름 서점가에 소설의 인기가 대단하다. <하얼빈>, <불편한 편의점 1, 2>, <파친코 1, 2> 등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한국 작가의 소설들이 차지하고 있다. 각본집과 대본집 열풍이 서점가를 한차례 휩쓸고 지나가더니, 이제는 독자들에게 몰입감을 선사하는 다양한 소설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가운데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에 다소 생뚱맞은 책이 한 권 올라가 있다. 모 출판사에서 출간한 <데미안(오리지널 초판본 표지 디자인)>이다. 1년 중 가장 치열한 신간 경쟁이 벌어진다는 여름 서점가에 갑자기 <데미안>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이유가 뭘까?
<데미안>은 우리나라에서 이미 팔릴 만큼 팔린 대표적인 고전 가운데 하나다. 문학동네나 민음사 등 ‘세계문학전집’을 보유한 전통적인 문학출판사들은 물론이고, 새롭게 문학 시장에 진입하는 웬만한 출판사도 <데미안>을 출간했다. 온라인 서점에서 ‘데미안’을 검색하면 무려 200여 종의 책이 확인된다. 그런데 최근 모 출판사에서 판매 중인 <데미안>에 대해 출판인들 사이에서도 “해도 너무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원성이 대단하다. ‘2970원’이라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판매가격 때문이다. 2016년 <데미안>이 처음 출간됐을 때 정가는 7500원이었지만, 얼마 전 출판사는 정가를 3300원으로 인하했다. 그리고 여기에 10%(330원) 추가할인까지 적용하면 독자들은 2970원에 책을 살 수 있다. 온라인서점에서는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를 묶어 9900원에 판매하는 이벤트까지 진행하고 있어, 사실상 ‘원플러스원(1+1)’ 판매를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초판본 마케팅’은 2015∼16년 무렵 시작됐다. 소월, 백석, 윤동주 등의 초판본 시집 표지가 등장해 베스트셀러가 되더니, 산문집과 해외 고전 문학까지 영역이 확장됐다. 초판본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 출판사들은 ‘최신 완역본’ ‘초판본 디자인’ ‘소장 욕구’ 등을 강점으로 부각하고 있다. 저작권이 소멸된 작품만을 골라 옛날 감성의 초판본 표지 디자인을 입혀서 책을 출간하는 방식은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상당히 남는 장사다. 저작권자에게 지급할 저작권료가 없으니 책이 많이 팔릴수록 이익은 더욱 커진다.
우리나라는 도서정가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재정가 도서’라는 허점이 있다. 출판사는 발행 이후 12개월이 넘은 도서에 대해 정가를 조정해서 판매할 수 있는데, 재고 도서를 처분할 수 있는 일종의 출구를 마련해주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베스트셀러에 올라가 있는 <데미안>은 도서정가제의 허점을 이용해, 기존 가격보다 무려 56% 할인된 가격으로 정가를 조정했다.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한 <데미안>과 비교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을 책정하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물론 책을 싸게 파는 것이 무조건 손가락질받을 일은 아니지만, 대다수 출판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면서까지 제 혼자 살겠다는 식으로 시장 질서를 혼탁하게 만드는 ‘폭풍 할인’은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질 수 있어 상당히 우려스럽다.
더 안타까운 것은 대형마트에서 벌어지는 치킨 할인 전쟁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 가운데, 재정가 도서를 악용한 서점가 할인 전쟁은 뉴스거리도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치킨만도 못한 책의 신세가 참으로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홍순철/BC에이전시 대표·북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