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군의 저격수로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올레나 빌로제르스카와 그의 남편. ㅁ 제공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
세계의 여성 17명,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삶을 이야기하다
윤영호·윤지영 지음 l ㅁ l 1만8000원
“전쟁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냐고요? 그 질문을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흐릅니다. 나는 흰색 웨딩드레스를 입는 대신 검은 운동복을 입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재앙이지만, 내가 겪는 고통은 이 전쟁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결혼을 앞두고 고향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의 폭격 소식을 들은 폴란드 거주 다리야 마르첸코)
“나는 나타샤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지만 긴박하고 절실한 상황에 있는 그녀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생각은 할 수 없겠더라고요.”(우크라이나 난민 여성에게 집을 내준 영국 아만다 그리토렉스)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일주일이 지났다. (걱정해 주던) 러시아 친구들의 이야기 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휴대전화에 “이건 우크라이나 국민을 상대로 한 전쟁이 아니야”, “우크라이나 정부는 왜 이것을 러시아의 침략이라고 하지?”와 같은 메시지가 오기 시작했다.”(영국 정부의 난민 지원 프로그램으로 런던에 온 우크라이나 루드밀라 홀로디)
“이제 벨라루스 여권은 일종의 낙인과 같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공범자이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해요.”(반전시위를 하다 구속된 뒤 고향을 떠난 벨라루스 소피아 마로자바)
시민들의 피난처이자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러시아군과 맞서 싸우던 마리우폴시의 대형 철강공장 아조우스탈 지하 사진. 사진을 찍은 작가 드미트로 코자츠키는 아조우스탈에서 군인으로 싸우다가 러시아군의 점령 후 포로가 되어 연락이 두절된 상황이다. ㅁ 제공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6개월이 되어간다. 공식 집계된 민간인 사망자 수만 5000명을 훌쩍 넘겼고 고향을 떠난 난민은 900만명에 이른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주변국에도 불안과 공포가 퍼지고 있다.
영국에 살고 있는 두 저자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영향 받은 여성 17명을 인터뷰했다. 피해 당사자인 우크라이나인을 포함해, 독재자의 잘못된 선택으로 원치 않게 가해자가 되어 고통받는 러시아와 벨라루스 사람들, 언제라도 피해당사자로 바뀔 수 있다는 두려움을 지닌 카자흐스탄 등 인접 국가의 사람들을 만났다. 대면으로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은 이메일과 ‘줌’, 모바일 앱 등으로 여러 번에 걸쳐 대화를 나눴다.
우선 눈길이 가는 건 고국을 떠났거나 머물면서 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목소리다. 러시아군에 함락된 마리우폴에서 태어난 다리야(가명)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이 일어나자 폴란드로 유학을 가 정착했다. 하지만 그의 모든 가족이 마리우폴에 살고 있었다. “벌써 52일 동안 어머니 쪽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고, 할아버지는 어딘가로 끌려가셨다고만 들었어요. (…) 아빠와 여동생은 전기, 난방, 물 없이 포격을 받으며 한 달 동안 버티다가 가까스로 마리우폴을 빠져나왔어요.” 인터뷰 당시 취소를 예상했던 다리야의 결혼식은 예정대로 6월에 진행됐다.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여동생과, 여동생을 혼자 보낼 수 없어 당국의 허락을 받은 아버지까지 두 명만이 폴란드에 와서 결혼식을 지켜봤다.
40대 여성 올레나 빌로제르스카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싸우는 저격수다. 저자의 말마따나 “저격수를, 그것도 전장에 있는 저격수를 인터넷을 통해 인터뷰할 수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올레나는 적에게 방아쇠를 당겼을 때 심적 괴로움이나 주저함이 있었냐는 질문에 답한다. “상대는 방금까지 나를 죽이려고 했어요. 그들에게 방아쇠를 당기면서 감상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그저 방아쇠를 당기는 거죠. 내가 쏜 총탄이 적을 곤경에 빠뜨렸다는 것을 알았지만, 적이 사망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코티지치즈와 계란을 사러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교대자가 왔고 나는 코티지치즈와 계란을 사기 위해 서둘렀지요.” 삶이 된 전쟁에서 피해와 가해, 정의와 불의, 인간성과 비인간성을 선명하게 가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영국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는 러시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안나 오브샤니코바의 여동생이 파리에서 반전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ㅁ 제공
전쟁의 고통은 국경을 넘는다. 벨라루스, 발트3국 등 인접 국가 사람들은 ‘다음은 우리 차례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러시아가 수도 키이우 공격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던 벨라루스의 소피아(가명)는 고향을 떠나 머무르는 곳마다 냉대를 당한다. 러시아에 동조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이유에서다. “민스크(벨라루스 수도) 출신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당황하며 눈을 돌리고 이야기를 더 진행하려고 하지 않지요. 그럴 때는 전쟁에 반대한다는 이야기와 감옥에 갔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누군가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공포심과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는 두려움”은 온전히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영국에서 음악가로 활동하는 러시아 출신 안나 오브샤니코바는 “전쟁을 일으킨 나라 사람”이라는 죄책감과 책임감으로 반전활동을 하지만 “조국을 배신했다”는 질타를 받기도 한다.
아나르 소문쿨루는 소련 시절 카자흐스탄 태생으로 튀르키예에 살고 있는 국제정치학 교수다. 튀르키예는 미-중 관계에 영향을 받는 한국처럼 미-러시아가 직접적인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곳으로 이번 전쟁에서 서방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그는 외교전문가로서 “러시아군의 숫자가 본격적인 침공을 하기에 충분하지 않”았고 “러시아 정부는 자국 내에서 프로파간다를 충분히 진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침공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러시아의 진짜 문제는 미국이 아니라 “우크라이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만한 경제적·문화적 매력을 만들지 못했고, 앞으로도 만들 능력이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탈출한 체조선수 출신 리디아 비노그라드나가 가족, 친구와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자동차에 실은 네개의 가방. 리디아는 난민 자격으로 부다페스트, 파리를 거쳐 런던에 도착했다. ㅁ 제공
전쟁의 비극 곁에는 이웃과 시민으로서의 연대와 우정이 있다는 게 그나마 위로다.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기 위한 예술가들과 난민을 돕는 이들의 인터뷰도 담겼다. 이름과 나이를 제외하고는 아무 정보를 알 수 없었던 나타샤를 환대한 영국인 아만다와 아만다의 집에 머물며 다시 생의 의지를 다진 나탸샤, 나란히 실린 두 여성의 인터뷰는 가슴 먹먹한 감동을 준다. “집에 도착한 날 밤, 휴대전화에서 우크라이나용 심 카드를 빼고 영국용 심 카드를 넣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만다가 가족과 편하게 연락하려면 우크라이나용 휴대전화도 필요하다면서 잠시 기다리라고 했어요. (…) 아만다가 동네 단체 대화방에서 여분의 휴대전화를 수소문했고 1분도 지나지 않아 답이 왔어요. 5분 만에 초인종이 울린 거예요. 다음날도 마찬가지였어요. (…) 매일매일 이웃들이 무엇인가를 들고 찾아왔어요.”(나타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아만다처럼 난민에게 집을 제공하겠다고 신청한 이들이 영국에서만 20만 가구에 달했다고 한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