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를 소재로 한 신작 소설 ‘하얼빈'을 낸 김훈 작가가 3일 오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출간 간담회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대학 영문과 학생 시절 저를 사로잡은 책 두권이 안중근 신문조서와 <난중일기>였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라고 강조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 두 책은 젊은 저에게 말도 못할 충격을 주었고 결국 저의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요. 안중근 신문조서를 읽으면서 든 느낌은, 인간의 사상은 밑바닥에 매우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것들을 포용하고 있겠지만, 그 사상을 배경으로 혁명에 나서는 자들의 몸가짐은 이렇게 가벼운 것이구나, 이런 것들이 혁명의 추동력이고 삶의 열정이로구나 하는 것이었어요. 제 소설 <하얼빈>은 그 시절 맛보았던 충격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소설가 김훈이 신작 소설 <하얼빈>을 내고 3일 오전 기자간담회를 마련했다. <하얼빈>은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사건을 중심에 놓고 전개된다. 작가는 “안중근의 짧은 생애가 뿜어내는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해” 집필을 미뤄두었지만, 지난해 건강 문제를 겪으며 “더 이상 미루어둘 수가 없다는 절박함”에 올 1월1일부터 집필을 시작해 생각보다 빨리 끝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 소설을 쓰면서 가장 신바람 나고 행복했던 순간은 안중근과 우덕순이 블라디보스토크의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만나 이토 살해를 모의하는 장면을 쓸 때였습니다. 두 젊은이는 이토 살해의 대의명분이나 추후 대책, 거사 자금 같은 것에 관해 단 한 마디도 토론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두 사람이 체포된 다음 검찰과 법원 심문에서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는 것이죠. 그 젊은이들이 시대에 대한 고뇌가 얼마나 무거웠을 텐데, 그 처신은 바람처럼 가벼웠지요. 젊은이다운 에너지가 폭발하는 이 대목이 가장 놀랍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훈의 신작, <하얼빈> 표지. 문학동네 제공
작가는 “안중근과 이토의 갈등, 문명개화와 약육강식의 갈등과 함께 반쯤은 제국주의에 발을 걸치고 있었던 천주교 사제들과 안중근의 갈등을 축으로 삼아 소설을 전개했다”며 “특히 이토를, 안중근의 총에 맞아 죽어 마땅한 쓰레기 같은 인물이 아니라 문명개화라는 대의와 약육강식이라는 야만성을 동시에 내면에 지닌 인물로 그리려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칼의 노래> 주인공인 이순신과 <하얼빈> 주인공인 안중근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관해서도 생각을 밝혔다.
“역사 속의 이순신은 왕조사상, 근왕주의의 힘으로 전쟁을 수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 소설에 나오는 이순신은 근왕주의가 없는 인물이죠.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 절망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들이받고 나가는 인물로 그렸습니다. 반대로 안중근은 희망의 목표를 갖고 싸운 사람입니다. 당시 동북아시아 정세는 이순신 시대보다 더 비극적이고 돌파구가 없어 보이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찾아나가려던 게 안중근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동양평화론>에 그 희망의 논리와 근거가 들어 있어요.”
안중근 의사를 소재로 한 신작 소설 ‘하얼빈'을 낸 김훈 작가가 3일 오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출간 간담회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김훈은 “안중근의 시대에 비해 지금 우리는 더욱 고통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세계 최대의 강국이 된 중국과 핵무장 한 북한의 군사동맹, 일본의 군사 대국화 지향과 미국과의 동맹 때문에 동양 평화가 정말로 위기에 처해 있다”며 “이 책 ‘작가의 말’에서 제가 ‘안중근을 그의 시대 안에 가두어놓을 수는 없다’고 쓴 것이 그런 뜻”이라고 설명했다.
작가는 마지막으로 <칼의 노래>에 이어 <하얼빈>에서도 일본과의 갈등을 소재로 삼은 것과 관련해서도 생각을 밝혔다.
“저의 개인적인 소견을 말하자면, 제 소설이 반일 민족주의로 이해되는 건 제가 원하는 바는 아닙니다. 민족주의는 국권이 짓밟히고 위태로웠던 안중근의 시대에 국권 회복을 위해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에는 민족주의가 국민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로서는 매우 허약하다고 생각해요. 계층 간 먹이 피라미드의 관계가 적대적인 사회, 이념과 갈등의 사회에서 민족주의가 이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낭만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민족주의를 배척하는 건 아닙니다. 민족이 집단적 정서와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생명 현상이겠지요. 그러나 현실의 갈등을 해결하고 통합하는 이데올로기가 되기에는 매우 빈약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