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문학번역원(NORLA)에서 주최했던 문학세미나에 참석한 손화수 번역가. 손화수 제공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ENA)의 열풍도 장애 관련 독서열로 연결되진 않는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각본집(을유문화사)이 7월 말 베스트셀러로 오르는 현상과 퍽 다르다. 그 가운데 노르웨이의 장애인 언어학자 얀 그루에(41)가 쓴 <우리의 사이와 차이>(아르테)가 지난달 한 온라인서점 사회과학 분야 주간 1위를 기록해 눈길을 끌었다. 세살 때 척수근육위축증을 진단받았던 그루에가 터득한 존엄의 감각이 시종 격조 있고 단단하게 회고된다.
“책을 번역하기 전 미디어에서 접한 그의 말투나 눈빛이 다소 오만해 보인다고 생각했”다던 이 책 번역가 손화수(50)씨는 두가지를 이후 반추했다. 번역가로서의 섬세한 촉이었을지언정 대화를 통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선입견이었고, 한편으로 “미묘한 오만함(의 인상)은 그를 당초 장애인이란 틀 속에 가둔 채 보았다면 연민이나 동정의 형태로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자문들이었다. 실로 한국에선 어느 장애인도 ‘오만’하기 어렵다. 두 나라의 이런 차이엔 내력이 있다. 2020년에 국내 출간한 덴마크 작가 페르 홀름 크누센의 1971년 책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는 초등 성교육도서로 정부 선정(여성가족부 ‘나다움어린이책’)되었다가 보수 정치인의 문제 제기로 회수됐다. 손 번역가가 2000년대 국내 소개한 노르웨이 초등생 성교육도서 <내 몸이 궁금해!>도 논란이 되어 회수됐다고 한다.
시공의 아득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북유럽 작품과 국내 독자 간 접점은 몇년 새 눈에 띄게 커지는 모양새다. 최초의 노르웨이 문학 한국어 번역가이자 유일한 ‘공식’ 번역가인 손화수씨를 세차례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그는 1998년 노르웨이로 이주해 현지 예술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한인 선생님이기도 하다.
―최근 북유럽 작품들이 충분히 소개되고 있다고 보는가?
“수년간 한국에 소개되는 스칸디나비아 문학서의 양이 꾸준히 늘어왔다. 소설, 아동도서가 많다. 다만 비즈니스를 간과할 수 없을 테고 (여전히) 한국 출판사 입장에선 음울하고 느리고 분량도 적지 않은 이곳 문학을 선뜻 소개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난달만 해도 덴마크 작가(한국계 입양 여성)의 작품까지 포함해 두권의 번역서를 냈다.
“노르웨이어는 스웨덴어와 구어에서, 덴마크어와는 문어에서 비슷한 면이 있다. 역사적·정서적 유사성도 크다. 스칸디나비아 문학으로 묶여 유럽, 영미 문학과 차이를 만든 이유다.”
―어떤 차이가 있나?
“영미권은 구성, 전개, 인물들이 명확하게 자리잡고 있어 독자들이 따라가면 된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문학은 사고와 사색을 요구한다. 아동도서에도 모호함과 깊이가 보이는데 독자에게 강요하진 않는다.”
―“지리멸렬한 회색지대의 문학”이라고도 특징을 표현했는데.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해 지기 전 차 없는 시골길을 달릴 때면 조심해야 한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일몰 직전 햇살과 섞여 도움이 안 된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엘크나 순록은 우리를 어느 날 덮칠지 모르는 삶의 고난 같다. 그럼에도 따로 보호막을 안 친다. 자연을 경외하고 있는 대로 받아들이는 성정 때문 아닐까. 그런 삶의 태도를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다.”
―주체성, 소수자를 다루는 작품들은 북유럽이 선도적이지 않나?
“아동문학에서 드러난다. 다른 나라들보다 더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것 같다. 얼마 전까지 여성 총리였던 노르웨이를 빼면 스칸디나비아 국가 모두 여성이 현재 총리이고 정부 각료 50%가 여성이며, 육아휴직을 부모가 각각 나눠 사용할 수 있다. 꾸준하고 소소하게 국민들 생활 저변에 자리하고 자연스레 습득된다.”
그는 대학 졸업 뒤 외국계 회사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터전을 옮겼다. 남편이 권하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새 언어에 ‘통달’했고 “한국에 꼭 소개하고 싶다”는 책들도 ‘발견’했다. 이주 4년 만에 번역했고, 2012년 노르웨이 번역인협회 회원이 되어 그해 노르웨이문학번역원에서 한해 1명만 주는 번역가상을 받았다. 서른이 넘어서는 소싯적 매진했던 피아노에 다시 이끌려 편도만 끊은 채 오스트리아로 날아가 입학 실기시험도 쳤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도전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대학이 받아줬고, 이제 그는 그런 학생들을 길러내고 있다. 올해만 20년째 번역 목록도 100권을 넘게 ‘길러냈다’.
2021년 노르웨이 제헌절 행사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손화수 번역가. 손화수 제공
―직역과 의역 사이 번역의 원칙이 있나?
“번역할수록 모국어의 이해와 표현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우리말의 다양한 표현은 번역가에게 득이기도 해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한국어는 굉장히 빨리 변하는 언어 같다. 한국을 떠났을 때의 언어에만 머물 수 없어 항상 노력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저자를 직접 만나는 게 철칙이다. 행간에 잦아드는 말투나 미소, 미묘한 손짓 등이 (번역하며) 겹쳐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원문을 그대로 전달하면서도 이 미묘한 차이를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번역한, 북유럽과 한국의 접점 중 하나인 입양을 강렬한 산문시로 전개시킨 마야 리 랑그바드의 작품 제목도 ‘그녀는 분노한다’, ‘그녀는 화가 난다’ 등이 아닌 <그 여자는 화가 난다>(난다)가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며 북유럽 출판 실적은 되레 호전되었다는 게 손 번역가의 설명이다. 해외 진출도 활발해진 덕분이다. 번역가의 구실도 클 수밖에 없다. 국가의 지원제도는 그의 설명을 모두 담지 못할 만큼 다양했다. 간단히 추리자면 ‘프리랜서’에게 주는 실직연금, 국가 예술인 장학금 제도뿐만 아니라 도서관 전용공간, 세미나, 사무기기, 세무, 분쟁 시 법률, 해외 리서치 여행 지원 등이 구체적으로 운용 중이다. 정책엔 모호한 회색지대란 게 없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