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듀나 지음 l 퍼플레인 l 1만5000원 에스에프(SF) 장르가 한국문학에 정착하는 데 역할을 해온 작가 듀나가 ‘미스터리’ 소설집을 냈다. ‘작가의 말’에서 설명했듯이 그는 <평형추>, <민트의 세계> 등 꾸준히 에스에프 배경의 미스터리 소설을 써왔지만 ‘에스에프 작가’로만 분류되는 것이 못내 아쉬워 이번에는 순수한 미스터리물, 즉 현재 또는 과거를 배경으로 하는 수록작 여덟 편에서 미궁으로 흘러가는 살인 사건을 풀어가는 데 집중했다. 특히 작가는 어린 시절을 함께 한 ‘동서추리문고’에서 접했던 미스터리 소설의 거장들의 영향을 자유롭게 작품 안에서 차용한다. 안에서 자물쇠를 굳게 잠근 밀실 살인을 소재로 하는 ‘성호삼촌의 범죄’는 존 딕슨의 <세 개의 관>에서 기데온 펠 박사가 하는 밀실 트릭 강의의 틀 중 하나를 가져왔음을 밝히고 있다. 표제작은 소설가 이전에 영화평론가로 활동했던 작가의 영화에 대한 애정을 담은 작품이다. “세자르와 베를린에서 여우주연상을 한차례씩 수상한” 룩셈부르크 출신 여배우가 쓴 일기 형식으로 프랑수아 트뤼포가 연출한 <아메리카의 밤>을 오마주했다. 조선 말기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에서 프랑스인 통역가로 출연하기 위해 한국 촬영 현장에 온 그는 낯선 언어를 더듬으며 함께 출연하는 이들을 기록한다. 그러다가 한류 스타 출신의 무례한 배우가 영화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어느 날 그가 세트장에서 목맨 시체로 발견된다. 범인이 어떻게 사건의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가는지를 엮어내는 알리바이 트릭 이야기다. 작품 중간에 묘사되는 이탈리아 공포영화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식 단서, 배우 송강호가 실제 영화 촬영 현장에서 했다는 말의 인용 등에서 소설과 영화가 겹쳐지는 재미를 준다. 소설집에 처음 수록된 ‘누가 춘배를 죽였지?’도 영화가 이야기의 무대다. 주인공은 80년대 배우로 활동하다 영화 현장에 환멸을 느껴 미국으로 떠난 인물. 그는 부친상 때문에 한국을 방문했다가 조카가 제작한 영화 시사회에 간다. 고등학교 동창 다섯명의 이야기로, 자살한 한 친구의 장례식장에 모인 네명이 이야기를 하면서 이 가운데 한명이 벌인 살인임을 알게 된다. 시사회 뒤풀이에 참석한 주인공은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영화 전체가 80년대 초 그의 출연작 촬영 현장에서 발생했던 다른 여배우 실종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만든 하나의 트릭이라는 걸 깨닫는다. 역시 첫 공개작인 ‘그건 너의 피였어’는 어린 시절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성소수자 주인공이 시체 없는 살인 사건의 범인임을 스스로 밝히면서 시작되는 폭력에 관한 이야기다. 이처럼 미스터리의 장르적 쾌감 외에도 성소수자 탄압, 미투 운동, 영화계 성폭력 문제 등 한국사회를 관통한 사회적 현안들이 작품 곳곳에 담겨 있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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