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R
전경린 지음 l 문학동네 l 1만4500원
가정 사정
조경란 지음 l 문학동네 l 1만5000원
독자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중견 작가 둘의 소설집이 나란히 나왔다. 전경린의 <굿바이 R>과 조경란의 <가정 사정>이다. 두 작품집은 각기 다른 문체와 이야기 방식으로 독자의 마음에 가닿으면서도 중년 여성의 삶을 관통하는 상처나 피로감, 하지만 회피하지 않는 어떤 의연함이나 품위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의 주제의식이 담겨있다.
“실제 삶이 없다면, 풍경은 얼마나, 지루한, 것이겠어요. 또 풍경이 없다면, 실제 삶은 얼마나, 비루한 것일까요……” <굿바이 R> 수록작 ‘사구미 해변’의 주인공 외영은 출장길에서 자동차 고장으로 우연히 동행이 된 기후에게 말한다. 전경린 작가의 아름다운 문장이 돋을새김처럼 빛나는 이 작품에서 외영은 고속도로의 연쇄 추돌사고 현장에서 남편과 아이를 잃고 홀로 살아남았다. 대기업 명함을 지닌 기후는 임원 승진에서 누락하고 기러기 가족으로 아이들과 떠난 아내와는 이혼 직전이다. 수록작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이들처럼 가족과 관련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있거나, 무탈해 보여도 붕괴의 조짐이 완연한 가족제도의 구성원들이다. ‘붓꽃’에서 오랜만의 고등 동창 모임으로 만난 친구들은 다른 친구 남편이 구조조정된 뒤 자살했다는 소식을 공유한다. “세균을 박멸하듯, 외로움에 단호하게 대처”하며 바쁘게 살아온 소양은 친구들이 모르는 우울증과 무력증에 허덕이고, 시부모와 시할머니까지 수발하며 “그분들의 마지막 사랑”을 곱씹는 정혜는 스트레스로 한쪽 청력을 잃고 이명에 시달린다. 누가 봐도 굴곡 없이 성공적인 가정생활을 일군 것 같은 유미조차 이렇게 말한다. “삶의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기분이야. 생존자인 거지. 너도 나도, 우린 살아남았어.”
신작 소설집 <굿바이 R>을 발표한 전경린 작가. 문학동네 제공
여행은 수록작들을 잇는 또 다른 연결고리다. ‘막연한 각오’에서 이혼하고 자식들도 다 큰 선경은 취업해 독립을 앞둔 아들과, 조카가 일하는 마카오로 여행을 간다. 자신이 물려준 불안정한 체질과 예민증을 모든 일에 “막연한 각오”로 이겨내려는 아들에 대한 안쓰러움도 잠시, 그는 선물을 고르는 아들에게 개입을 하면서 “발밑의 얇은 얼음이 파삭 깨어지면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의 심연으로 추락할 것 같”은 긴장을 이어간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저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조차 무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에서 버둥거리는 인물들을 향해 “희망은 아니지만 냉소도 아닌” 느슨한 유대감 또는 이해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표제작의 주인공 ‘나’는 인도네시아 발리섬을 여행 중이다. 여행자라면 응당 이곳저곳을 구경해야 한다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강요에도 꿋꿋이 허름한 게스트하우스와 그 주변을 서성일 뿐이다. ‘나’는 오래 전에 쓰다만 소설 주인공 ‘R’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계속 꿈 속에서 그녀의 고통과 직면한다. ‘나’는 숙소에서 전 남편을 찾아 이곳에 온 호연을 만나고 결국 호연이 찾아내지 못한 전 남편 대신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프게 태어나 갑자기 떠나간 아빠를 그리워하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이의 짧은 생애. 매듭짓지 못한 ‘R’의 사연은 호연의 사연이기도 하고 작가 자신, 나아가 “현실의 짐을 등에 지고 고독과 방랑에 익숙한 채 도처에서 이곳과 저곳의 경계를 밟으며 끊어지는 말들을 힘겹게 이어가는”(작가의 말) 세상 모든 그녀들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신작 소설집 <가정 사정>을 발표한 조경란 작가. 문학동네 제공
조경란 작가의 <가정 사정>에서 가족은 좀 더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여기서도 가족은 불의의 사고나, 코로나 등 속수무책으로 벼랑 끝에 몰리거나,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흩어지고 무너져가는 관계다. 표제작은 불시에 아내와 아들을 잃은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다. 홀로 수선집을 운영하는 중년의 독신 딸은 아파트 경비원인 아버지를 챙기지만 서로의 조심스러움과 호의는 어긋나곤 한다. 어머니와 남동생이 살아있을 때도 딸은 “자신의 가족을 누가 먼 데서 본다면 한 차양 밑에 모여 서로 무심히 다른 쪽을 바라보는 사람들 같아 보일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고독을 경유하다가 “때때로 어떤 일 앞에서는 그 차양 아래로 모여들 수밖에 없는” 이들. 전경린 작가의 표현을 빌린다면 “희망은 아니지만 냉소도 아닌” 묵묵한 연민으로 묶여있는 존재로서 가족을 작가는 그린다.
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견디는 여성을 그린 ‘이만큼의 거리’와 중년의 나이에 인력 사무소를 전전하며 노모를 건사하는 딸의 이야기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어린 시절 함께 죽으려고 자살을 시도했던 부모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의 예상치 못한 여정을 따라가는 ‘개인 사정’은 헤어날 길이 난망한 지뢰밭을 걸어가면서도 주변을 향해 손 내미는 연대의 여성서사다.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의 주인공 상희는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손님의 돈 만원을 집어갔다고 오해받은 어린 동료 부경을 돕는다. 곧 식당을 그만 두면서 상희는 이 일을 곧 잊지만 이따금 부경에게 문자를 받는다. “비빌 언덕이 없는 애들은 늘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쉽게 듣고 마는 부경은 곧 시설을 나와야 하는 ‘요보호 아동’이다. 누군가에게 곁을 내준다는 게 사치처럼 여겨지는 팍팍한 삶이지만 부경의 존재는 상희 모녀의 삶으로 조금씩 들어온다. 상희보다 나을 것 없는 처지인 인주(‘개인 사정’)는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는 오빠 때문에 엉뚱하게 일곱 살짜리 ‘남의 자식’을 돌봐야 할 처지에 놓인다. 인주는 대구에서 올라오는 길에 만난 아주머니로부터 지하철서 만난 가여운 장애 청년 이야기를 한참 듣고 말한다. “왜 슬픈 이야기는 사람들을 가깝게 만들어줄까요” 그리고 깨닫는다. “그 슬픈 이야기들이란 사실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가는 이야기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조경란 작가는 곁에서 듣는 그 슬픔의 이야기가 “서로를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며 살아갈 위안을 준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