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대하여
박상영 지음 l 문학동네 l 1만4500원
신작 소설집 <믿음에 대하여>를 발표한 박상영 작가. 사진 조혜진
박상영(34) 작가의 신작 소설집 <믿음에 대하여> 띠지는 이 작품을 <대도시의 사랑법> <1차원이 되고 싶어>를 잇는 ‘사랑 3부작’의 최종장으로 소개한다. 연작 형태로 네 개의 수록작에서 각각 중심이 되는 등장인물, 즉 두 커플은 사랑하고 좌절한다. 하지만 전작의 인물들이 불합리하고 완고한 사회의 벽에 거칠게 부딪히고 깨졌다면 이들은 그 앞에서 마모되는 느낌이다. 크고 작은 모욕을 끼니처럼 받아들이는 직장인이나 임대료를 감당해야 하는 영세 자영업자로 불가항력의 실패를 겪어도 “이 모든 것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나 자신을 비난”(‘믿음에 대하여’)할 수밖에 없는 30대가 됐기 때문이다. 박상영 특유의 활기 넘치는 문체는 여전하지만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온도가 바뀌었다.
그만큼 작품들에는 직장생활의 세대갈등과 부동산 문제 등 현실사회 모습이 많이 스며있다. 무엇보다 지난 2년간 한국사회를 뒤흔들었고 앞으로도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울 코로나 팬데믹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수록작 중 세 편은 등장인물들의 삶과 사랑이 코로나 유행으로 인해 위태롭게 흔들리거나, 돌이킬 수 없는 금이 가거나, 흔적도 없이 붕괴되는 풍경을 보여준다.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문학적 성찰이라고 부를 만하다.
표제작의 화자인 ‘철우’는 사귀던 Y의 죽음 이후 그가 믿었던 Y의 모든 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 사람에 대한 믿음과 함께 잘 나가던 사진가로서의 커리어도 접는다. 이태원에 “누구든 편하게 들를 수 있는 작은 술집”을 차려 자리 잡는다 싶을 무렵 코로나가 유행하고 이태원이 대규모 확산의 진원지로 낙인 찍히면서 파산지경에 이른다. 매일 “장을 보고 장사를 하고 한숨을 쉬며 셔터를 내리고 보광동 빌라로 돌아와 누워 잠”들면 족한 삶이 속절없이 무너진다. 제목에서 말하는 ‘믿음’은 철우가 Y에게 배신당한 믿음이면서, 팬데믹 앞에서 “정해놓은 휴무 날 외에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이들이 생존의 울타리를 지켜주지 못한 이 사회에 가졌던 믿음이기도 하다.
신작 소설집 <믿음에 대하여>를 발표한 박상영 작가. 사진 최모레
20일 서울 합정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박상영 작가는 이번 작품을 써내려간 힘이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구체적인 고립감과 공포심이었다”고 말했다. 전업작가로 창작을 할 때의 두 가지 루틴인 카페에서 글을 쓰고 피트니스에서 운동을 하는 게 금지되며 열흘 넘게 입 한번 열지 않을 만큼 완벽한 단절을 경험했다. 팬데믹 초기 확진자의 동선을 낱낱이 공개하던 방역대책은 이곳저곳에서 사람을 만나야 하고 방송국에 녹화를 가는 등 일상의 움직임조차 얼어붙게 만들었다. “술집이라도 갔다가 확진이 되면 당장의 생계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친구들도 만나지 못하고 식당도 못 들어갈 정도였어요. 동선이 공개되는 건 곧 사회적 낙인이기도 했고. 견고한 줄만 알았던 내 삶의 조건들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구나 라는 걸 깨달았죠.”
‘보름 이후의 사랑’에서 회사원 ‘찬호’와 커플인 ‘남준’은 방송기자다. 노조 파업 때 비정규직으로 들어와 유일하게 정규직으로 살아남은 남준은 뉴스 앵커로 발탁된다. 대중에게 “이쪽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노출되는 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남준의 “방어적인 태도”와 외향적인 찬호의 생활방식은 갈등을 품을 수밖에 없다. 확진자가 폭증하고 “기남시 55번 확진자”가 이태원 클럽에 방문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태원이 신천지에 빗댄 “춤천지”로 조롱받을 무렵, 다른 확진자가 다녀갔다는 철우네 가게에 들렀던 찬호도 검사대상이 된다. 결과는 음성이었지만 남준은 말도 없이 피난민처럼 황급히 짐을 싸 거처를 옮긴다. 보름 뒤의 재회를 기약하며 남준은 말한다. “보건소나 아무튼 그런 데서 연락 오면, 우리는 만난 적이 없는 거다.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일 뿐인 거야. 알지?”
코로나 유행과 맞물렸던 부동산 광풍은 두 삼십대 남성의 삶에도 끼어든다. 어른이 된다는 건 손바닥만 한 원룸에서든, 반지하 빌라에서든 짐가방 하나로 살림을 합칠 수 있던 시절이 마감됐다는 뜻이다. 남준은 아파트 가격대를 뒤지고, 대출방법을 조사하면서 둘이 살 거처를 찾는다. 취향대로 집을 고치고 큰 티브이, 값비싼 소파까지 채워진 아파트의 삶은 한영과 철우 커플에게도 영향을 준다. 이는 삼십대 중반이 된 박 작가와 친구들의 현실적 고민이 담긴 이야기다.
“한국사회가 부동산으로 추동되는 곳이죠. 그래서 <1차원이 되고 싶어>에서도 아파트 재개발이라는 소재를 전면에 끌어오긴 했지만 지난 3~4년은 30대에게 부동산 ‘영끌’이 가장 큰 화두였어요. 제 친구들만 봐도 사회생활의 출발선은 같았는데 결혼을 일찍 해서 빨리 영끌을 한다든가 했던 친구들과 아닌 친구들 사이에 많게는 10억이 넘는 자산 차이가 현실이 됐어요. 이제 불과 삼십대 중반인데 이렇게 삶이 판이해졌다는 건 사회가 잘못된 게 아닌가, 열심히 일하는 사회인이라는 건 무얼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어요.”
나이 들면서 비정한 사회의 부속품이 되어가는 이들의 이야기들이기도 하지만 “연약한 믿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작가의 말’)는 작가의 낙관주의 또한 작품 곳곳에 배어 나온다. 표정과 복장까지 수모를 당하던 남준의 첫 직장 동기이자 몇년 뒤 한영의 동료가 된 ‘은채’는 권위적인 조직과 “요즘 애들” 사이에 끼어 애를 먹으면서도 착실히 성과를 내지만 이내 공격 받는 처지에 놓인다.
“네 주위를 둘러봐. 번호표 뽑고 너 망하길 기다리는 사람들뿐이야. 그 사람들한테 책잡히고 싶어서 안달 난 거니? 고작 여기서 멈추려고 그 고생을 하며 아득바득 온 거야?”(‘우리가 되는 순간’)
임원 승진을 앞두고 은채를 닦달하는 진연희 부장의 말은 스스로에게 토하는 말이기도 하다. 비정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두 여성과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그 어떤 수모를 당해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하면서 “평생 동안 노래를 부르던 연금을 단 한번도 수령해보지 못한 채” 병으로 세상을 떠난 ‘리나 이모’의 삶을 작가는 연민과 연대의 시선으로 이어놓는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