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 그려진 ‘평생도' 가운데 소과 응시 장면을 담은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담헌 홍대용은 중국에서 사귄 친구 엄성(嚴誠)에게 간곡한 말로 과거를 치르지 말라고 충고했다. 관직보다는 인격의 완성을 추구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과거와 관직에 대한 담헌의 생각은 다분히 부정적이었다. 그렇다면 담헌은 과거에 응시한 적이 없었던가. 그렇지 않다. 여러 차례 응시했지만 합격하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다. 고종사촌 홍치익이 담헌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면, 젊은 날 담헌은 과거 포기 여부를 두고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담헌은 과거공부는 인격의 수양을 해치는, 무의미한 일이라는 뉘앙스로 말을 했지만, 사실 그는 과거공부에 별로 재능이 없는 ‘과포자’(과거공부 포기자)에 가까웠을 것이다.
담헌의 절친 연암 박지원도 과거 합격자가 아니다. 아들 박종채는 연암이 젊었을 때 과거공부를 했고 성균관의 시험에서 친구들이 읊조릴 만한 괜찮은 작품을 더러 썼지만 끝까지 완성한 것은 없었다고 전한다. 어떤 경우 시험장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답안지에 늙은 소나무나 바위를 그려놓고 나왔다고도 하였다. 1770년 연암은 진사시 1차 시험에 수석을 차지했으나, 2차 시험은 응시할 생각이 없었다. 친구들의 강권에 시험장에 들어가지는 했지만,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고 나왔다. 연암 역시 과거 응시를 탐탁찮게 보는, 아니 어딘가 불결하게 보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랬다.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후기 과거는 공정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 공부도 의미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과거를 탐탁찮게 보고 기피하는 담헌과 연암의 태도도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또 과거에 대한 그런 오연한 태도는 도리어 그 사람의 고결한 인격을 돋보이게 하는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뿐일까? 과거가 타락한 시험이었다면, 과거 합격 이후 진입하는 관료사회는 그보다 더 타락한 세상이었다.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더러워했다면 당연히 관료가 되는 것 역시 기피해야 마땅한 것이었다. 담헌과 연암은 관직도 기피했던가?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담헌은 1774년 11월 세자익위사 시직(侍直)에 임명되었다. 시직은 세자(이때는 世孫 곧 正祖)를 시위하는 직무를 맡기에 대단히 명예로운 벼슬로 쳤다. 문벌가의 학문이 있는 사람만 선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시직 이후 담헌은 지방관으로 나갈 수 있었다. 연암 역시 1786년 친구인 고위관료 유언호( 俞彦鎬)의 추천으로 선공감 감역이 되어 벼슬길에 나섰다. 마지막에는 양양부사까지 지냈다. 과거에 합격하지 않았기에 둘 다 지방수령에 그쳤지만 그 역시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담헌과 연암은 서울의 귀족화한 최고급 양반, 곧 경화벌열(京華閥閱)의 일원이었기에 과거 없이도 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과거에 대해 오연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골의 선비라면, 상것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언필칭 ‘실학자’라고 하는 담헌과 연암이 내세웠던 개혁책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 멋있는 개혁의 아이디어는 왜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었던 것인가? 왜 종이 위의 공언(空言)으로만 남았던 것인가. 혹 이들이 먼저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한 귀족이자 기득권층이었기 때문은 아닌가.
강명관/인문학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