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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두려웠다, 휠체어에 앉아 있단 사실을 알아챌까봐

등록 2022-07-08 05:00수정 2022-07-08 09:28

노르웨이 언어학자의 자전에세이
기록·타자화 통한 존재론적 성찰
장애담론의 언어·감각 넓힌 수작

“비교가 불가능한 단 하나의 몸…
바로 나만의 몸이 있을 뿐이다”
수치·공포·자유의 문학적 발화
그래픽 동혜원 hwd@hani.co.kr, 게티이미지뱅크
그래픽 동혜원 hwd@hani.co.kr, 게티이미지뱅크

리의 사이와 차이
얀 그루에 지음, 손화수 옮김, 김원영 추천·해제 l 아르테 l 1만8000원

마침내 하늘을 버리고 인간계로 ‘하강’한다. 쓰러진 자신의 머리에서 처음 흘러나오는 피를 보고 인간이 되었음에 기뻐한다. ‘영원불멸’ 대신 사라져가는 ‘지금’을 선택한 천사 다미엘의 이야기(<베를린 천사의 시>, 빔 벤더스 감독)다. 동료 천사는 만류했으나 세계엔 애면글면 인간이 된 천사들이 없지 않다. 왜일까. 다미엘은 말했다.

“영원히 맴돌기보다 지상(Earth)에 묶이는 나의 무게를 느껴보고 싶어. 폭풍이 불 때마다 ‘지금’(now)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해, ‘영원히’(forever), ‘무한히’(for eternity)가 아니라.”

감독의 설명대로라면, 구제불가의 인간계에 분노한 신에게 한번 더 기회를 줘야 한다던 천사들이 유배된 데가 나치 뒤의 베를린이다. 그럼에도, 그 도시에서 다미엘이 하고 싶은 건 목욕하고 신문을 읽고 실수한 누군가로부터 사과를 받고, 말 한마디 않되 그 인간들의 말을 모두 이해하는 소소하게, 자연스러운 일들이다.

거장의 영화에 수반된 비평은 다양하나, 궁극에 ‘자유’의 본질이 은유된달까. 자유는 유한한 자들의 허기이며, 유한성에서 비롯하는 주체들의 언어다.

<우리의 사이와 차이>에는 <베를린 천사의 시>가 첫 장 짧게 언급된다. 그러나 이후의 장들을 읽을 때마다 집요하게 되읽게 한다.

‘인간이 된 천사’가 오래 어깨 위에 머물렀었다 말하는 노르웨이 출신의 저자 얀 그루에(41)는 현재 오슬로대학의 언어학 교수다. 부모도 학자였으며 “하나가 되었다”고 소개하는 아내 이다, 네댓살 아들이 있다. 얀은 훌륭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감각은 섬세하다. 집 안에서 고작 물 한잔 뜨러 갈 때의 동선, 주변 사물과의 관계에서 형태 짓는 체위와 동작을 책 세 쪽에 걸쳐 복기한다. 야외 수영장에서 몸 담근 한때의 느낌을 두 쪽에 풀고, 18살 때 처음 맞춘 수제코트의 품위와 그 코트를 걸쳐 입던 저만의 방식을 또 한 바닥 적어낸다. 시공의 단위가 조금 더 큰 일 앞에선 잠을 설칠 만하다.

“각각의 여행은 수백개의 작은 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움직임은 셀 수 없이 많은 요소로 나눌 수 있다… 내게 필요한 것들을 세세히 보다 보면 완벽한 기억력을 지닌 푸네스(‘기억의 천재 푸네스’, 보르헤스)와 마찬가지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다… 불면증은 세상을 놓아 버리지 못하는 상태다.”

병적이라 해야 할 지적 태세는 재능 덕분이 아니다. 그는 자연스러움, 기록될 가치도 없는 그 자연스러움의 자유를 갈망했고, 갈망한다. 다만 천사 다미엘과 같은 “하강”이 아니라 “상승”(영화에선 “상선”이란 표현이 나온다)으로만 그 인간세계에 “진출” 가능하다. 얀은 모든 상황과 동작, 아마도 주변의 시선조차 미분해 예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장애인인 것이다. 세살 때 단명할 가능성과 함께 척수근육위축증을 진단받고, 이내 “임상의 시선” “관료의 언어”에 온 가족이 포박되며 외부세계로 내몰린다. “존재”가 아닌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하나의 신체”, 문제를 지적할수록 ‘문제’가 되어버리는, 그래서 분개하지만 스티그마(낙인)를 결코 거둘 수 없는 ‘불멸’의 세계.

책은 얀이 영원할 줄 알았던 과거를 지나 자신을 ‘지금 세계’의 한 존재로 감각하고 규정하기까지의 여정을 담는다. 선형적인 길은 없다. 진단서와 의사 소견, 지원 조건을 입증하라는 기관의 문서들, 아울러 “내게서 한발짝도 벗어날 수 없”게 하는 억압과 배제의 시선(로즈메리 갈런드톰슨), 이로써 강제되는 ‘종속적 주체성’(미셸 푸코)은 수치심과 동시에 더한 중증장애인을 경멸하는 이중성으로까지 배태된다.

“(중학교 입학 전 희귀질환아동 캠프에서 만난) 세실리에의 병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었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고… 세실리에의 손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좋았다… 그리고 캠프는 끝이 났다… 나는 이 세계에선 세실리에와 사귈 마음이 없었다… 적어도 내 친구만큼은 비장애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얀 그루에. 사진 Mathias Fossum / Gyldendal Norsk Forlag
얀 그루에. 사진 Mathias Fossum / Gyldendal Norsk Forlag

기억은 때로 우리를 기만한다. 제 욕망의 각주가 되고, 누군가의 현실은 차별하는 기제가 될 수도 있다. 얀이 스스로 타자화하여 제 존재를 추궁하고, 정확한 언어로 전망하고, 정확한 언어로 절망하는 이유이겠다.

“나는 내 몸에서, 상처 입고 뒤틀린 내 발목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이 몸을 벗어난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다.”

하여 선택한 저항은 “(장애를) 수치스러워하지 않으며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그를 통해 인간계에서 ‘나를 위한 자리’를 확보하는 일이다. “나와 같은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젖어”들 수 있는 공간.

하지만 얀은 지금도 “한꺼번에 너무 많은 꿈을 꿀 수 없다. 눈을 뜨면 슬픔이 찾아들기 때문이다.”

책의 원제는 <나는 당신과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이다. 애초 작정한 제목은 ‘한 인간으로 거듭나기까지’이다. 묻어둔 제목은 내면의 독백이요, 꺼낸 제목은 독백을 넘어선 말걸기다. 의도했든 안 했든 이 차이는 독자에게 간과되어서는 안 될 중층의 나직한 고백을 증폭한다. ‘인간’ 아니었던 자가 말하는 ‘당신’들의 삶, 자신과 달리 그럴 수 없는 이들―가령 평생 홀로 살다 숨을 거둔 장애인 시인 마크 오브라이언―까지 아울러 이르는 ‘우리’의 삶.

스웨덴, 핀란드 청년들이 일을 찾아 간다는 나라가 노르웨이다. 막강한 복지국가에서 장애인의 존재론적 성찰은 당장의 이동, 노동, 교육 영역에서의 문턱이 꽤, 많이 낮기에 더 깊은지도 모른다. 얀이 좌절하고 분노하면서도 “견고한” 주체로서의 삶을 수긍해갈 때, 한국은 생애를 건 언어만을 요구했고, 요구한다. “왜 우리는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김순석, 소아마비, 32살, 1984년 자살, 최초 이동권 항거),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보고 그렇게 함께 갑시다”(우동민, 중증뇌병변, 43살, 2011년 시위 중 병사)와 같은 오래된 말들(<유언을 만난 세계>, 2021년)조차 여태 지상에 오지 않았고 자유롭지 못하다.

문장의 풍경 1. “휠체어 사용이 자유로운 모든 도시들은 서로 닮았고, 휠체어 사용이 불가능한 도시들은 제각각 나름으로 다르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등지에서의 경험을 기록한 5장 ‘여기는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문장의 풍경 1. “휠체어 사용이 자유로운 모든 도시들은 서로 닮았고, 휠체어 사용이 불가능한 도시들은 제각각 나름으로 다르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등지에서의 경험을 기록한 5장 ‘여기는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문장의 풍경 2. 지은이는 세살 때의 진단이 틀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장애는 그대로이지만, 단명의 가능성은 틀릴 수도 있단 얘기다. 6장 ‘언어의 중력장, ‘얀그루에신드롬’’.
문장의 풍경 2. 지은이는 세살 때의 진단이 틀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장애는 그대로이지만, 단명의 가능성은 틀릴 수도 있단 얘기다. 6장 ‘언어의 중력장, ‘얀그루에신드롬’’.

문장의 풍경 3. “나는 글을 쓰며 수치심을 고찰하고 표출하며, 글과 함께 수치심을 내려놓고자 한다.” 8장 ‘수치심을 내려놓으려 한다’.
문장의 풍경 3. “나는 글을 쓰며 수치심을 고찰하고 표출하며, 글과 함께 수치심을 내려놓고자 한다.” 8장 ‘수치심을 내려놓으려 한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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