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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과학적 깨달음의 두렵고 황홀한 순간들

등록 2022-06-17 05:01수정 2022-06-17 21:43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l 문학동네 l 1만6000원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한 하이젠베르크. 위키미디어 코먼스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한 하이젠베르크. 위키미디어 코먼스

공기에서 질소를 추출, 인공비료 대량 생산의 길을 터 인류를 기아로부터 해방했지만 자신이 개발한 독가스로 수천명을 살상하고 훗날 가족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은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 포화가 쏟아지던 참호에서 일반상대성 방정식을 풀어내고 블랙홀의 존재를 예언한 독일 물리학자 슈바르츠실트, 정수론의 오랜 난제로 알려진 ‘에이비시(abc) 추측’을 증명하는 논문을 발표했지만 이에 대한 동료 수학자들의 질문과 문제 제기에 철저히 침묵하며 지금까지도 논란의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는 일본 수학자 모치즈키 신이치, 그리고 뉴턴 이후 과학자들의 유전자에 면면히 새겨져 온 결정론적 세계관을 산산조각낸 불확정성의 원리의 하이젠베르크….

양자역학을 두고 하이젠베르크와 논쟁을 벌인 슈뢰딩거. 위키미디어 코먼스
양자역학을 두고 하이젠베르크와 논쟁을 벌인 슈뢰딩거. 위키미디어 코먼스

세번째 소설인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칠레 소설가 벵하민 라바투트(42)의 야심은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창조해낸 역사적 순간이나 인생 드라마를 조명하는 데 있지 않다. 위의 과학자들이 남겨놓은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소설적 상상력이 들어가는 부분은 바로 과학자들의 머릿속, 정신세계다. 이를테면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표제작은 하이젠베르크와 논쟁을 벌인 슈뢰딩거, 그리고 ‘물질파’라는 개념을 도출해 슈뢰딩거의 이론적 바탕을 제시한 드 브로이가 그들의 독창적인 이론을 개발하기까지의 광기 어린 집착을 그린다.

여기서 광기는 흔히 쓰듯 천재성의 다른 표현이 아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집요한 탐구 끝에 다다른 세상의 끝, 즉 절대불변으로 여겨졌던 진리가 붕괴되는 지점에서 그들이 경험하는 인식의 전환이다. 블랙홀의 이론적 가능성을 계산해낸 슈바르츠실트는 “형태나 차원이 없는 공허, 볼 순 없지만 온 영혼으로 느낄 수 있는 그림자”, 다름 아닌 세상의 파국을 발견했다고 두려워했다. 또한 작가는 양자역학의 체계를 만들면서 치열하게 싸운 슈뢰딩거와 하이젠베르크가 겪었던 신경쇠약과 정신적 발작을 세심하게 묘사하면서 인간이 인식의 한계를 돌파하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경이로운 도약인지 보여준다.

표제작에서 하이젠베르크는 “과학이 연구할 수 있는 범위 바깥의 ‘현실 세계’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박으면서 말한다. “우리 시대의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객관적이고 초연한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자연과 맺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과학이 세상에 비추는 빛은 우리가 바라보는 실재의 모습을 바꿀 뿐 아니라 그 기본적 구성 요소의 행동까지도 바꿉니다.” 기술적 진보가 아닌 인식틀로서 왜 과학이 여전히 중요한지 설명하는 저자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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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로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며 주목받은 칠레의 소설가 벵하민 라바투트. 위키미디어 코먼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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