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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저택은 불사르고, 미친 여자는 구출해야 한다

등록 2022-06-17 05:00수정 2022-06-17 10:41

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

멕시칸 고딕
실비아 모레노-가르시아 지음, 공보경 옮김 l 황금가지(2022)

어렸을 때 감명 깊게 본 고전도 나이 들어 보면 같은 감상이기가 쉽지 않다. <제인 에어>와 <레베카>가 그중 대표적인 작품이다. 역경을 극복하는 여성의 자유 의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기조는 유사해도, 여기에 결부된 낭만적 감정은 더는 없다. <제인 에어>와 <레베카>의 화자가 지켜낸 애정 뒤에는 미친 전처의 죽음이 깔려 있고, 불타버린 저택의 잿더미일 뿐인 남자에게로 돌아가는 여성 주인공들의 결정을 이제는 찬성할 수 없다.

<멕시칸 고딕>은 거대 저택에 구속된 여자들을 다룬 영미 고딕 소설들을 승계하면서 멕시코의 맥락에서 구현한 환상 소설이다. 즉, <제인 에어>와 <레베카>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대답이다. 1950년 멕시코시티에 사는 자유로운 젊은 여성 노에미 타보아다는 시골의 외진 마을 엘트리운포에 사는 사촌 언니 카탈리나의 편지를 받는다. 편지에는 새로 결혼한 신부의 행복이 아니라, 남편이 자기에게 독을 먹이려 하니 구해달라는 여자의 애원이 담겼다. 노에미는 언니를 무사히 데려오면 인류학 석사 과정에 진학하도록 해주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받고 엘트리운포로 떠난다. 하이 플레이스 저택에 도착한 노에미는 카탈리나의 남편인 버질 도일과 그의 아버지 하워드 도일, 그리고 버질의 사촌 누나인 플로렌스와 그의 아들 프랜시스와 만난다. 이 가부장제의 엄격한 성채가 카탈리나를 가둬놓고 광기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그 광기에 노에미도 같이 휩쓸리며 무의식의 환상이 만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브론테를 만난 러브크래프트”라는 <가디언>의 평처럼 <멕시칸 고딕>은 19세기~20세기 초의 고딕 소설, 그리고 20세기 중반의 고딕 로맨스, 현재의 ‘가정 누아르’의 기반이 되는 여성의 공포를 생생하게 포착한다. 이런 장르의 특징은 모두 여성이 안전을 느껴야 할 가정에서의 위험을 그린다는 것인데, <멕시칸 고딕>은 이에 우생학과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을 더했다. 영국에서 은광 채굴을 위해 멕시코로 온 도일 집안은 노골적으로 우생학을 신봉하며, ‘타고나게 우월한 인종’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동시에 지역민들을 쥐어짜서 자신들의 가문을 유지하려고 한다. 우생학은 필연적으로 출산하는 여성의 신체를 이용한다. 하이 플레이스 저택을 지탱하는 괴생명체도 여성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착취한다. 멕시코 여성인 노에미는 그를 얽매는 굴레에 저항하여, 카탈리나와 프랜시스를 구하려고 한다. 이 굴레에는 노에미가 버질에게 느끼는 성적 욕망도 포함된다. 로맨스의 관점에서 여성이 느끼는 신체적 갈망조차도 독이 만든 환상일 뿐이다.

<제인 에어>와 <레베카>에선 미친 여자가 저택에 불을 지르거나 가족을 망가뜨리려 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로부터 탈출한다는 결말이었다. <멕시칸 고딕>은 저택 자체가 여성들의 생명력을 빼앗았고, ‘미친 여자’도 구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무너지는 저택의 화염 속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어간 여성들은 과거의 악몽처럼 잊혀도 괜찮은 존재가 아니었다. 탈출하는 여자들은 자기 자신과 미친 여자를 같이 구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만 모습을 달리하면서 계속 이어지는 위협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박현주/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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