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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이유 없이 살아가자, 외롭지만 외롭지 않게

등록 2022-06-17 05:00수정 2022-06-19 21:27

SF 소설가 천선란의 두번째 소설집
지구 멸망, 인공지능 등 소재로
떠나고 내몰리는 사람들 그려
“지브리가 만드는 내 작품 보고 싶어”
노랜드

천선란 지음 l 한겨레출판 l 1만5800원

소설가 천선란씨가 15일 오후 서울 삼성동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소설가 천선란씨가 15일 오후 서울 삼성동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놀라운 속도다. 지금 가장 주목받는 젊은 소설가 중 한 명인 천선란(29)은 그가 표현한 대로 “질주하듯이” 창작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이 나온 지 2년 만에 내놓은 두번째 소설집 <노랜드>는 지난 한 해 발표한 단편들과 이번에 처음 공개하는 한 작품 등 10편을 묶었다. 두 작품집 사이에는 장편소설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나인>도 들어 있다. <노랜드>에 실린 작품들이 그간 작가가 발표한 단편 전부도 아니다. 사랑스러운 이야기, 발랄한 이야기 등 색색깔로 들어 있던 <어떤 물질의 사랑>과 달리 ‘노랜드’라는 제목이 들어맞는 작품들, 정주하지 않고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만 골라내 책 표지처럼 푸른색 톤으로 작품집을 완성했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떠나는 이유는 다양하다. 외계인 침공으로 또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으로 파멸하는 지구를 떠나기도 하고(‘바키타’, ‘푸른 점’, ‘우주로 날아가는 새’), “아이가 태어나서도, 자라서도 안되”는 “빌어 처먹을 마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도망가듯 떠나오기도 하며(‘이름 없는 몸’), 특별한 능력을 갖도록 만들어진 뒤 효용가치를 다했다는 이유로 떠날 것을 강요받기도 한다.(‘흰 밤과 푸른 달’) 또한 떠날 곳이 없어도 “이 행성에 잘못 태어난 거” 같은 소외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표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세계’의 유진이나 ‘제, 재’의 제가 그런 인물이다. ‘두 세계’에서 출구 없는 이 세상을 스스로 떠난 유진의 쌍둥이 자매 유라는 책을 팔면서 그 내용을 동영상으로 구현하는 회사 ‘노랜드’의 동영상 서비스 운영자다. 동영상은 인공지능을 통해 이야기의 큰 흐름 속에서 독자들과 쌍방향 소통으로 진행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락스>라는 작품 동영상이 실제 책 내용과 전혀 다른 결말을 제시하는 오류를 낸다. 유라는 이 책을 샀던 사람들을 추적하다가 0과 1로 채워지는 알고리즘의 세계를 탈출하려는 인공지능의 열망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파악하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에 순응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유진과 인공지능은 다를 바 없는 존재다.

‘제, 재’의 제와 재도 유진, 유라처럼 이란성 쌍둥이 같은 존재이지만 이들은 한 몸 안에서 살아간다. ‘해리성 인격 장애’를 가진 인물의 두 인격이다. 재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을 가진 천재이지만, 제는 평범하다. 타인은 물론 부모조차도 “(재를) 기대했다가 아님을 알고 실망하거나 흥미를 잃는 표정에 익숙해”진 제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자신의 존재가치에 회의를 느낀다. ‘작가의 말’ 첫 문장에 나오는 “이유 없이 살아가자”는 제나 유진, 그리고 내몰린 등장인물들을 위해 작가가 건네는 말이다.

소설가 천선란씨가 15일 오후 서울 삼성동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소설가 천선란씨가 15일 오후 서울 삼성동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15일 오후 강남 테헤란로의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난 천선란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삶에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어떤 당위성, 기쁘거나 행복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왜 살아가야 하나, 쓸모없는 삶이 아닌가라는 생각 때문에 늘 우울감과 함께 살아왔다”면서 “나이 들면서 살아가는 것에 이유를 붙이지 않아도 된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도 된다는 말을 인물들을 통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에는 조금 외롭고 우울한 이야기들로 작품집을 꾸렸다”고 말했다.

‘바키타’는 천선란 작가를 소개할 때 자주 등장하는 구절인 ‘동식물이 세상의 주류가 되고 인간은 비주류가 되는’ 세상을 그린 작품이다. 인공화합물, 즉 플라스틱 쓰레기를 먹는 외계인이 등장하면서 거침없이 플라스틱을 소비하다가 결국 외계인들의 ‘가축’으로 전락하는 인간의 미래다. 인간들이 수천년간 쌓아온 문명은 폐허가 됐지만 밀려났던 동식물들이 자신의 땅으로 돌아온 이 미래를 작중 화자는 “파멸이나 몰락, 함몰, 종말 같은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번영”이라고 표현한다. 이제 우리 나이 서른에 진입한 작가는 “먼 미래도 아닌 30~40년 뒤에는 의식주를 포함해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들을 누릴 수 없는 세상이 될 거라는 걸, 만약 누리더라도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용될 것이라는 걸 막연한 불안이 아닌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동 세대의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기후변화나 동물권 등에 관심을 가지고 때로 적극적 활동에 나서며 작품 안에서도 우리에게 닥칠 미래를 끊임없이 상상하는 이유다.

이번 책에서 처음 공개하는 ‘이름 없는 몸’은 좀비물이다.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며, 작가를 오랫동안 괴롭힌 작품이기도 하다. “좀비물을 너무나 좋아하기도 하고, 처음에는 장편으로 썼던 작품이에요. 그런데 웬만한 상상력의 갈래들이 다 작품으로 나와 있다 보니 써놓고도 영 자신이 없어서 분량을 절반 이상 줄이고 등장인물들에 초점을 맞춘 ‘전사’(前史) 형식으로 새로 썼습니다.”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오래전 도망치듯 떠나온 시골 고향에 돌아간 ‘나’는 유일한 친구를 비롯해 주민들이 다 죽음을 맞은 폐허를 발견한다. 그리고 시작되는 공격. 주인공이 외로운 서울생활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았던 ‘언니’에게 구조를 요청하면서 끝나는 작품은, 작가 말대로 “엄청나게 크게 벌어질 다음 이야기”를 예고하며 “언젠가 제대로 쓰고 싶은, <월드워 Z> 같은 대작”의 탄생을 기대하게끔 한다.

두번째 소설집을 마무리한 직후에도 천선란 작가의 “질주”는 진행형이다. 작가가 소속된 블러썸크리에이티브와 씨제이이엔엠(CJ ENM)이 손잡고 개발 중인 ‘언톨드 오리지널’ 프로젝트 참여작을 막 탈고했고, 하반기에는 현대문학 경장편 ‘핀’ 시리즈로 새 작품을 선보인다. 또한 이번 작품집에 수록된 ‘옥수수밭과 형’을 드라마 대본으로 쓰고 있으며, 오리지널 영상 콘텐츠 ‘허도:패와 창귀’의 작가로도 참여하고 있다. 소설가로 드라마 작가로 종횡무진하면서도 ‘투니버스 키드’로 자란 그가 가장 보고 싶은 건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하는 자신의 작품이다. “지브리 스튜디오가 <천개의 파랑>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너무 행복할 거 같아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얼굴이 빗자루를 타고 날아가는 <마녀 배달부 키키>처럼 환해졌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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