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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역사는 변질되어도 폐허는 영혼에 새겨진다

등록 2022-06-10 05:00수정 2022-06-10 11:17

콜롬비아 현대사 담은 장편소설
‘폭력의 시대’ 낳은 가이탄 암살

케네디 암살처럼 제기되는 음모론
진실 숨긴 사회의 비극적 운명

폐허의 형상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l 문학동네 l 1만8500원

“나는 늘 카페 파사헤에서 브랜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서 산책을 시작해 로사리오 광장을 가로지르고, 카예 14를 통해 동쪽으로 걸어가서 시인 호세 아순시온 실바가 1896년 가슴에 총 한 방을 쏘아 자살한 언덕배기 자택 앞 보도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남쪽으로 계속 걸어가서(…) 음모자 한 무리가 칼을 휘두르면서 집에 침입해 침실에서 그를 죽이려고 시도하던 1828년 9월의 그 무법적인 밤에 시몬 볼리바르가 뛰어넘었던 창문 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국회의사당 옆 카레라 7로 나와 스무 걸음을 더 걸었는데, 그곳에는 1914년에 (이곳에서) 일어난 라파엘 우리베 우리베 장군의 암살사건을 애석해하면서 약간은 불편하게 중언부언한 대리석 명판 두 개가 있었다. 곧이어 북쪽으로 네 블록을 더 가서(…)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이 암살당해 쓰러진 인도까지 걸었다.”

현재 콜롬비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하나인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는 소설 <폐허의 형상>에서 대학 시절부터 줄곧 산책하던 보고타 중심가에 새겨진 살인과 폭력의 흔적을 도로표지판처럼 묘사한다. 콜롬비아의 현대사에 묻힌 익명의 죽음까지 포함하면 표지판보다는 보도블록의 숫자에 더 가까울 터다. 1948년 4월9일 자유당 정치인 가이탄이 총에 맞아 살해된 뒤 벌어진 폭력사태(‘보고타소’)로 이틀 만에 시민 이천여명이 죽었고, 이로 인한 보수당 지지자와 자유당 지지자들의 극한 대립은 1960년대 초까지 이어지면서 20만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 그리고 콜롬비아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고 불안정한 나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2015년 발표된 이 장편소설은 1973년생인 작가의 현재적 삶까지 면면히 흐르는 폭력의 역사를 자전적 형식으로 그린다.

오랜 외국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나’는 어느 날 박물관으로 바뀐 가이탄의 옛집에서 한 남자가 가이탄이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양복을 훔치다가 붙잡혔다는 뉴스를 본다. 그 남자 카를로스 카르바요는 가이탄 암살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는 일념에 사로잡힌 인물로 ‘나’와 오랜 시간 악연처럼 엮인 존재다. ‘나’는 스물세살 때 치료를 받다가 알게 된 저명한 외과 의사 베나비데스를 몇 년 뒤 임신한 아내가 입원한 병원에서 다시 조우하고 집으로 초대받는다. 그곳에서 만난 인물이 카르바요다. 카르바요는 9·11테러와 다이애나비 교통사고 등이 모두 배후를 가진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음모론자’로 가이탄 암살사건 역시 공개적으로 알려진 로아 시에라의 단독범행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나’는 카르바요의 광기 어린 음모론에 난색을 표하면서도 콜롬비아 현대사에 검고 긴 그늘을 드리운 가이탄 사건에 마음이 붙잡힌다. “그 범죄 사건이 일어난 뒤로 흐른 세월 속에서 우리 콜롬비아 사람들은 1948년 그 금요일에 일어난 사건을 이해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는데, 많은 사람은 그 사건을 어느 정도는 진지한 오락거리로 만들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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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형상>을 쓴 콜롬비아 작가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문학동네 제공

카르바요는 1963년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에 오즈월드가 아닌 또 다른 저격자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음모론처럼 가이탄 역시 권력층이 개입해 기획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에는 콜롬비아 문학사의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도 포함된다. 마르케스가 쓴 자서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에서 당시 사건에 대한 회고를 보면 가이탄이 총탄에 쓰러졌을 때 “고급 옷을 입고 피부는 설화석고처럼 매끄럽고 하얗던” 남자가 군중을 선동했다고 실제로 기록돼 있다. 분노한 군중의 폭력으로 로아 시에라는 그 자리에서 죽고 사건은 보수당에 의해 황급히 봉합됐다.

소설은 가이탄 암살과 쌍둥이 같은 사건으로 1914년 발생했던 우리베 장군 암살사건을 카르바요가 간직한 자료집 형식으로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권력층이 가난하고 젊은 두 노동자의 즉흥적 결심으로 벌어진 잔인한 도끼살인이라고 정리하려는 이 사건을 젊은 변호사 마르코 툴리오 안솔라가 조사에 나선다. 그는 경찰과 검사가 애써 무시한 진술, 제삼자의 개입 현장 목격 증언들을 1년여에 걸쳐 수집하면서 사건의 진실을 연결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결국 실종되고 흩어진 증언들만이 유령처럼 남아 떠돌게 된다.

1948년 총격 테러로 사망한 콜롬비아 정치인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의 유해 일부가 담긴 병. 문학동네 제공
1948년 총격 테러로 사망한 콜롬비아 정치인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의 유해 일부가 담긴 병. 문학동네 제공

“살인의 도시, 공동묘지의 도시, 길모퉁이마다 시체가 있는 도시”의 비극적 운명이 이 소설의 한 주제라면 또 다른 주제는 카르바요로 대변되는 음모론이다. ‘나’는 카르바요가 집착하는 음모론을 혐오하면서도 숨겨진 진실을 캐내어 작품으로 써달라는 집요한 요구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계속 서성거린다. 진실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된 사회에서 “한번도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망각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마지막 방법은 소문처럼 떠도는 이야기의 조각들을 맞춰보는 것뿐이다. 따라서 실재했던 사건과 인물들이 곳곳에 스며 있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허구적 인물인 음모론자 카르바요는 숨겨진 진실을 구해내기를 열망하는 작가의 다른 자아로 볼 수 있다.

가이탄의 사체를 부검하면서 남은 척추의 일부, 부검의였던 베나비데스의 아버지가 유리병 속에 보관해온 그것은 음모론과 진실 사이에 놓여있는 ‘물리적 실체’다. 그 유해의 일부에 숨겨진 진실이 있을 거라고 주장하는 카르바요에게 ‘나’는 소리 지른다. “그것들은 단순히 유해, 인간의 폐허죠. 그래요, 고귀한 인간들의 폐허일 뿐이라고요.” 하지만 작가는 이 ‘폐허의 형상’이 “우리의 지난 과오에 대한 기록이며, 또한 예언이기도” 하다는 걸 알고 있다. 권력자의 삭제와 왜곡이 갈가리 찢어놓은 역사라 하더라도 이 폐허의 형상만은 사람들의 영혼에서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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