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현대사 담은 장편소설
‘폭력의 시대’ 낳은 가이탄 암살
케네디 암살처럼 제기되는 음모론
진실 숨긴 사회의 비극적 운명
‘폭력의 시대’ 낳은 가이탄 암살
케네디 암살처럼 제기되는 음모론
진실 숨긴 사회의 비극적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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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l 문학동네 l 1만8500원 “나는 늘 카페 파사헤에서 브랜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서 산책을 시작해 로사리오 광장을 가로지르고, 카예 14를 통해 동쪽으로 걸어가서 시인 호세 아순시온 실바가 1896년 가슴에 총 한 방을 쏘아 자살한 언덕배기 자택 앞 보도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남쪽으로 계속 걸어가서(…) 음모자 한 무리가 칼을 휘두르면서 집에 침입해 침실에서 그를 죽이려고 시도하던 1828년 9월의 그 무법적인 밤에 시몬 볼리바르가 뛰어넘었던 창문 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국회의사당 옆 카레라 7로 나와 스무 걸음을 더 걸었는데, 그곳에는 1914년에 (이곳에서) 일어난 라파엘 우리베 우리베 장군의 암살사건을 애석해하면서 약간은 불편하게 중언부언한 대리석 명판 두 개가 있었다. 곧이어 북쪽으로 네 블록을 더 가서(…)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이 암살당해 쓰러진 인도까지 걸었다.” 현재 콜롬비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하나인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는 소설 <폐허의 형상>에서 대학 시절부터 줄곧 산책하던 보고타 중심가에 새겨진 살인과 폭력의 흔적을 도로표지판처럼 묘사한다. 콜롬비아의 현대사에 묻힌 익명의 죽음까지 포함하면 표지판보다는 보도블록의 숫자에 더 가까울 터다. 1948년 4월9일 자유당 정치인 가이탄이 총에 맞아 살해된 뒤 벌어진 폭력사태(‘보고타소’)로 이틀 만에 시민 이천여명이 죽었고, 이로 인한 보수당 지지자와 자유당 지지자들의 극한 대립은 1960년대 초까지 이어지면서 20만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 그리고 콜롬비아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고 불안정한 나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2015년 발표된 이 장편소설은 1973년생인 작가의 현재적 삶까지 면면히 흐르는 폭력의 역사를 자전적 형식으로 그린다. 오랜 외국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나’는 어느 날 박물관으로 바뀐 가이탄의 옛집에서 한 남자가 가이탄이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양복을 훔치다가 붙잡혔다는 뉴스를 본다. 그 남자 카를로스 카르바요는 가이탄 암살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는 일념에 사로잡힌 인물로 ‘나’와 오랜 시간 악연처럼 엮인 존재다. ‘나’는 스물세살 때 치료를 받다가 알게 된 저명한 외과 의사 베나비데스를 몇 년 뒤 임신한 아내가 입원한 병원에서 다시 조우하고 집으로 초대받는다. 그곳에서 만난 인물이 카르바요다. 카르바요는 9·11테러와 다이애나비 교통사고 등이 모두 배후를 가진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음모론자’로 가이탄 암살사건 역시 공개적으로 알려진 로아 시에라의 단독범행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나’는 카르바요의 광기 어린 음모론에 난색을 표하면서도 콜롬비아 현대사에 검고 긴 그늘을 드리운 가이탄 사건에 마음이 붙잡힌다. “그 범죄 사건이 일어난 뒤로 흐른 세월 속에서 우리 콜롬비아 사람들은 1948년 그 금요일에 일어난 사건을 이해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는데, 많은 사람은 그 사건을 어느 정도는 진지한 오락거리로 만들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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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형상>을 쓴 콜롬비아 작가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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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총격 테러로 사망한 콜롬비아 정치인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의 유해 일부가 담긴 병.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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