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 디자인
사와다 도모히로 지음, 김영현 옮김 l 다다서재 l 1만6000원
국내 굴지의 광고회사는 2020년 신입 공채부터 카피라이터를 더는 별도 채용하지 않고 있다. 대신 광고기획자(AE) 모집으로 사실상 수렴시켰다. 한 줄 한 마디 주술의 약세와 유튜브 등의 실재에서 보듯 스토리에 상품을 씌우는 기획의 강세라는 시장의 변화를 감지하게 한다.
덜 노골적인 듯 그러나 더 내밀하고 집요하게 “마케팅은 제품 싸움이 아니다, 인식의 싸움이다”(알 리스와 잭 트라우트)는 명제를 공략해가는 풍조이겠다. 전술이 변화할지언정 목표가 달라지진 않는다. “팔리지 않는 것은 크리에이티브가 아니며 광고는 예술이 아니”고 “광고는…제품을 판매하기 위함”(데이비드 오길비)으로 존재한다.
일본의 광고 전문가가 쓴 <마이너리티 디자인>은 적이 다르다. 애써 옮기자면 ‘소수(를 위한) 디자인’이니, 자본주의의 지상명령이자 광고의 지상과제인 ‘대중 소비’가 저자의 세계에선 추앙되지 않으리란 점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게다가 “기업의 마케팅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던 장애인과 약자를 주요 ‘의뢰인’으로 삼는다. 강점은 다들 비슷하니, 약점이야말로 저마다를 가장 두드러지게 한다며.
사와다 도모히로(41)는 2004년 광고회사에 입사한 18년 차 베테랑. 일본 내 <슈퍼맨 리턴즈>, <다크 나이트 라이즈> 등의 영화 개봉작 카피를 썼다. 칸 국제광고제, 클리오 광고제, ACC 도쿄크리에이티브 어워드, TCC상 등을 받은 적은 없(는 것 같)다. 상을 받은 때로부터 커리어가 본격화된다는 선배들의 말을 따라 여러 상에 응모하며 업계 주류가 되고자 투신했고, 때로 8000만명에게 도달한 티브이 광고를 만들기도 했으나, 광고주 주문에 맞춰 납품만 하면 된다는 ‘납품사고’로–그마저도 밤낮없이 쥐어짜야 가능했으므로–지쳐가던 이 시대 여느 직장인과 다르지 않은 20~30대를 보낸다.
경력과 회의가 비례, 퇴적하는 광고회사 ‘직원’에서 열정적 ‘광고장이’로 그를 거듭나게 한 건 뜻밖으로 2013년 태어난 아들이다. 더더욱 뜻밖으로, 아버지가 어떤 내로라하는 광고상 수상작을 만들건 그것을 눈에 담을 수 없는 시각장애 아들. 10년 차 직장인 가장이 엄습한 ‘불행’ 앞에서 절박하게 (마치 시장조사하듯) 찾아 읽고 만난 책과 200명의 장애인들은 행복과 풍요, 고난의 의미를 재정의해주기 충분했다. 희열로 깨달은바, 장애란 가엾거나 스스로 극복해야 할 과제가 아니거니와, 소수자 관점에서 바꿔가야 할 세계는 ‘실체 없는 대중’의 소비기호를 창출하거나 자극하려던 세계보다 명료하고 유쾌했다. 우리 모두가 어떤 영역에선 취약하고 서투른 소수자인 때문에 ‘시장성’마저 예외로 둘 게 못됐다.
가령 이런 일들이다. 2014년 때마침 일본시각장애인축구협회의 행사 홍보를 맡는다. 참가 선수들이 눈가리개를 한 채 축구를 한다. 소리 내는 공을 쫓아 패스하고 슛을 한다. 애오라지 소리만 감각되므로, 관중들은 침묵해야 한다. 저자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했다. “시각을 빼앗기는 무서운 체험”이 아닌 “시각이 닫히는 안심”. 일상의 과도한 시각 정보를 부러 잠시 차단해두는 오프타임(“OFF T!ME”으로 표식했다). 약점은 그저 ‘다른 관점’인 터 그가 각타하듯 던진 카피는 이랬다. “보이지 않아, 그뿐(미에나이, 손다케).”
2014년 일본에서 개최한 시각장애인 축구 세계선수권대회 포스터. “보이지 않아, 그뿐”이라는 카피가 쓰여 있다.
계기로 그는 선·후천적 강점과 약점을 희석해버리는 새로운 스포츠를 기획한다. 스포츠를 중시하는 미국 고교에 다니며 체육을 저주로 여겨야 할 만큼 운동치였던 동양인이 스스로 감춰둔 오래된 약점을 드러내고, 그와 같은 ‘운동 소수자’들이 비로소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육아경험자에게 그나마 유리할 법한 아기농구, 비누가 묻은 공을 도구 삼아 핸드볼 선수 출신도 ‘꼼짝마라’인 핸드소프볼, 버블축구 등등. 지은이는 2015년 이런 유형의 스포츠를 ‘느슨하다’ ‘부드럽다’ 뜻의 유루이(緩い)와 합성한 ‘유루스포츠’로 개념화하고 협회도 만들어 100여가지 종목을 개발해낸다.
인색하게 보자면 레포츠, 레크리에이션의 진화이고, 광고회사의 사회공헌, 광고인의 재능기부가 가미된 소위 ‘지속지능’형 광고사업의 한 시도랄 수도 있다. 실제 이들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기업들은 제 기술, 이미지를 톡톡히 ‘세일즈’하게 된다.
그렇다 하여 책이 도달해낸 ‘개념’이 퇴색될 까닭은 없다. 폐 끼침을 극도로 경계하는 일본 사회에 누군가 곤란하다 말하고 알아채려는 일의 중요성을 저자는 강조한다. 민폐의 가치다. 소비지상주의 전사인 광고업자로서 “대중적인 것 따위는 없다”고 말한다. 공략 대상으로서의 대중집단이 아닌,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한 사람’을 대상 삼고 ‘작은 흐름’에 관계하는 일의 가치다. 이러한 개념들은 그의 말마따나 켜켜이 쌓여 모두 “사회의 인프라”가 될 법하다. 운동 낙오자가 시각장애 아들을 가슴에 품고 기획홍보한 축구, 지방소멸·고령화에 맞서고자 했던 고치현 사업은 그 가운데 하나이고, 그렇게 “지금까지 없던 시장”도 만들어진다.
아동문학의 고전이자 세기의 스테디셀러로 이후 판타지물이나 ‘해리포터’ 시리즈를 쓴 조앤 롤링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1908)이 작가 케네스 그레이엄이 앞을 보지 못하는 아들에게 들려주려고 지은 얘기라는 사실이 진리처럼 책과 함께 환기된다.
의족을 패션 소재로 재해석해 2015년 개최한 ‘절단 비너스 쇼'. 이는 시부야, 롯폰기, 오사카, 교토 등 전국에서 계속 개최되는 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부연. 동기를 잃거나 평범성을 확인하며 뻔해져 가는 직장인 10여년 차에게도 책이 소구하는 점은 올돌해 보인다. 제 경험에 비춰, 스스로에게 기획서를 써보라는 조언. “한번에 바뀌지 않”는 세계를 “그러니 한번씩 바꾸면” 된다고 믿는 이들에게 뻔해질 틈이 얼마나 되겠는가.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사진 다다서재 제공
한 여성 참가자가 손과 공에 비누를 묻힌 채 ‘핸드소프볼’을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