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세밀화로 장식한 <평화의 수호자> 필사본. 위키미디어 코먼스
평화의 수호자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 지음, 황정욱 옮김 l 길 l 5만5000원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1275~1343)는 서양 고대 사상과 근대 사상 사이에 다리를 놓은 중세 후기의 정치철학자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정치사상이 마르실리우스의 저술을 통과해 근대 정치사상으로 이어진다. <평화의 수호자>(1324)는 마르실리우스 정치사상이 집결된 저작으로 꼽히는데, 중세 라틴어로 쓰인 이 저작이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돼 나왔다.
이탈리아 자유도시 파도바에서 태어난 마르실리우스는 파도바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해 의사가 됐지만 후에 철학과 신학을 더 깊이 공부해 파리대학 교수를 지냈고 짧게나마 파리대학 총장을 맡기도 했다. 마르실리우스의 아버지는 파도바의 공증인이었는데 당시 공증인은 자유도시의 길드 체계에서 비교적 신분이 높은 계층에 속했다. 마르실리우스는 파도바 정치지도자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정치 공간과 정치 토론에 친숙했다.
마르실리우스의 지적 성장기와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당대에 영향력이 컸던 아베로에스 철학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본명이 이븐루시드인 아베로에스(1126~1198)는 스페인 남부 코르도바 출신의 아랍계 철학자였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철저히 탐구해 유럽에 전해준 사람이다. 잃어버린 아리스토텔레스를 되돌려준 사람인 셈이다. 아베로에스는 ‘이중진리론’의 주창자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성으로 논증된 세속의 진리’와 ‘계시를 통해 알려진 신앙의 진리’가 충돌할 경우에 이 둘이 모두 참이라고 보는 것이 아베로에스주의가 말하는 이중진리론의 핵심이다. 종교의 진리와 세속의 진리를 분리해 따로따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마르실리우스는 파도바대학 시절에 아베로에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익혔다.
마르실리우스가 <평화의 수호자>라는 정치철학적 저작을 쓴 것은 당대 유럽의 정치 상황과 직접적 관련이 있다. 당시 유럽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지지하는 황제파(기벨린파)와 로마 가톨릭 교황을 지지하는 교황파(겔프파)로 나뉘어 있었다. 특히 파도바가 속한 이탈리아 북부는 황제파와 교황파 사이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교황과 황제라는 이중권력이 서로 우위에 서려고 싸운 것인데, 11세기에 시작된 그 싸움은 마르실리우스가 활동하던 시기에 교황 요한 22세와 황제 루트비히 4세 사이의 충돌로 나타났다. 당시 청빈을 신조로 삼은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무소유를 주장하며 교황과 맞선 것이 충돌의 계기가 됐다.
루트비히 4세가 프란체스코회를 지지하자, 그러잖아도 황제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요한 22세는 1324년 루트비히 4세를 파문했다. 루트비히 4세는 즉각 ‘작센하우젠 호소’를 발표해 교황을 이단자라고 선언했다. 황제와 교황이 서로를 부정하고 적대하는 이 분란의 와중에 교황을 비판하고 황제를 지원할 목적으로 쓴 것이 <평화의 수호자>다. 그러므로 ‘평화의 수호자’라는 제목은 분란의 원인인 교회와 교황에 맞서는 세속적 정치권력을 뜻하고, 더 직접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가리킨다.
<평화의 수호자>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제1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대한 주해를 통해 국가의 문제를 다루고, 제2권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 대한 주해를 중심으로 하여 교회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이 두 주제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마르실리우스의 정치철학적 관심 속에 하나로 엮인다. 제1권의 서두에서 마르실리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국가에 관한 일반적 지식을 잘 서술한 것은 맞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만으로 당대 유럽에서 벌어지는 분란의 원인을 알 수는 없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종교 권력과 세속 권력의 분화와 대결이라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만 보아서는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는 얘기다. 마르실리우스의 근본 관심은 교회 권력이 세속 권력과 갈등을 빚음으로써 평화가 교란되는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하는 데 있다.
이 문제를 놓고 마르실리우스는 아베로에스주의를 자신의 관점에 따라 극단화한다. 아베로에스주의의 ‘이중진리론’은 종교적 진리와 세속적 진리가 충돌할 때 양자의 참됨으로 모두 인정함으로써 교회와 국가의 공존을 추구한다. 그러나 마르실리우스는 이런 중립적 태도에 머물지 않고 세속 진리 안으로 종교 진리를 끌어들여 통합하고자 한다. 요컨대 교회를 국가에 복속시키고자 한다. “도시나 왕국에는 하나의 최고 통치직만 있어야 한다.” 교회 권력을 세속 권력에 복속시키는 방식으로 정치권력을 단일화활 때 평화가 실현될 수 있다는 논리다.
이 논리는 당대에 교회 권력 쪽에서 주장하던 ‘신정론’을 거꾸로 뒤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정론이란 신의 대리인인 사제가 종교적 원리에 따라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마르실리우스는 이 논리를 역전시켜, 세속 권력이 교회 권력을 장악해 하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과정에서 교황과 교회에 대한 비판을 쏟아낸다. 교황청은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고 마르실리우스를 파문한다. 하지만 이런 금압을 뚫고 이 책의 수많은 필사본이 유럽 각지로 전파돼 읽혔고, 마르실리우스의 단호한 반교권적 주장은 16세기 종교개혁에 중대한 이념적 동력이 됐다.
더 주목할 것은 이 책에 담긴 정치철학적 함의다. 마르실리우스는 세속 권력의 단일성을 입증해가는 과정에서 모든 권력의 토대를 ‘인민’(populus) 또는 ‘시민 전체’에서 찾았다. 시민 전체로서 인민이 권력의 바탕이며 법을 제정할 근원적 권한을 소유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다만 마르실리우스는 이 권한이 구체적인 입법과 집행 과정에서 시민 전체를 대표하는 소수에게 위임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모든 권력이 인민에게서 나온다는 규정은 원리적 이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추상적 이념에서 인민주권과 사회계약이라는 근대 정치사상의 원칙이 자라났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로마의 정치사상이 망각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마키아벨리를 거쳐 홉스-로크-루소의 정치사상으로 나아가는 데 마르실리우스가 거점 노릇을 한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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