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강명관의 고금유사
사헌부 지평 정제선(鄭濟先)은 1683년(숙종 9년) 청(淸)나라 북경으로 가는 사신단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다. 한양을 출발한 사신단은 평안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넌다. 그런데 평안도에서 정제선은 뜬금없이 사람 여섯을 죽인다. 사건을 정리해 보면 자기 집에서 달아난 계집종 2명과 그들의 남편(婢夫), 그리고 이들과 친분 관계가 있던 양민 2명을 죽인 것으로 보인다. 법에 따르면 그는 상명(償命)해야 했다. 곧 목숨으로 갚아야 하는 죄라는 말이다. 하지만 사건을 담당한 의금부에서는 꼭 사형에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을 빙빙 돌렸다. 다른 신하도 거들었다. 법대로 사형을 강력하게 고집하는 사람은 없었다. 숙종은 신하들의 태도에 화를 내기는 했지만 정제선을 사형에 처하지는 않고 전라도 강진현으로 귀양을 보냈다. 10년 뒤인 1694년 어머니가 죽고 아비가 나이 70이 넘어 불쌍한 신세가 되었다는 신하의 말에 숙종은 정제선의 유배를 풀어주었다.
40년 뒤인 1734년 함경도에 살인사건이 있었다. 함경도 남병사(南兵使) 이의풍(李義豐)이 시답잖은 일로 병영(兵營)의 장교 배수현을 장살(杖殺)했던 것이다. 남편의 죽음이 너무나 억울했던 자근례(者斤禮)는 병영의 하속들에게 돈을 풀어 내응을 약속받은 뒤 아버지 장명엽, 오빠 장만팽, 그리고 남편의 친구들과 함께 이의풍을 습격했다. 달아나는 이의풍을 따라잡은 자근례는 작은 칼로 그의 엉덩이를 찔렀다. 충분치는 않았지만 그나마 복수가 이루어진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북청부가 그냥 있을 리 만무했다. 당연히 군사를 풀어 자근례를 비롯한 핵심 인물들을 체포하고 사건을 조정에 보고했다. 충격을 받은 영조는 신하들의 말을 듣고 특별히 어사를 파견해 자근례 등을 잡아들였다. 법조문을 들먹이지도 않았다. 즉각 자근례 등 여섯 사람의 목을 베어 북청부 문 앞에 내걸었다. 달아난 자들의 목에는 현상금을 걸었다.
사람 여섯을 죽인 정제선은 사형에 처해야 마땅했지만 법을 손아귀에 쥔 자들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이의풍이 엉덩이를 찔렸던 것은 배수현을 장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배수현을 죽인 죄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도리어 그는 영조의 신임을 받아 출세를 거듭해 포도대장을 거쳐 어영청(御營廳) 대장까지 지냈다. 하지만 이의풍의 엉덩이를 찔렀던 자근례와 그의 가족, 친지는 군중이 보는 앞에서 목이 댕강 잘렸다. 6명을 죽인 정제선의 경우는 법조문이 있어도 지키지 않았고, 엉덩이를 찌른 자근례의 경우는 법조문은 아예 들먹이지도 않았다. 재판 따위도 없었다.
조선에도 당연히 형법이 있었다. <대명률>(大明律)이 그것이다. 하지만 왕과 조정의 고위관료들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하고 강력한 불문법(不文法)이 있었다. ‘내 마음대로 법’이었다. 이 법은 <대명률> 따위를 우습게 알아 죽어 마땅한 사람을 살리고, 살아 마땅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자기 패거리인 고위관료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고 백성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가혹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21세기 대한민국에 ‘내 마음대로 법’은 없어졌는가, 아닌가?
인문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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