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여성 작가 35인, 그들을 글쓰기로 몰아붙인 창작의 무대
타니아 슐리, 남기철 옮김 l 이봄(2020) 집안에 내 자리가 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 공중에서 빙빙 도는 먼지가 된 기분. 눈을 뜨면 매일의 가사 노동이 시작된다. 글을 쓰려고 앉으면 빨래 더미가 보이고, 다시 앉으면 창틀에 쌓인 먼지가 보인다. 흐트러진 신발이, 싱크대의 얼룩이, 수저통 아래에 고인 물때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눈앞에 펼쳐진 것들을 쫓아가며 처리하다 보면 시간은 훌쩍 지나 있다. 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돌봄 노동, 가사 노동, 감정 노동. 모든 게 사소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훌쩍 떠나고 싶은 욕구가 올라온다. 더 낮은 곳으로 마음을 여는 사람이고 싶었는데, 가끔 내 인식은 오로지 내가 머무는 집의 크기로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 오늘도 나는 내가 머무는 이 공간만큼만 생각하고 살아냈구나. 책은 내 세계를 열어주는 확실한 문이지만, 이런 날이면 글자가 빼곡한 책을 손에 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때를 대비해 작업실 구석에 쉽게 열 수 있는 책 한 권을 두었다. <글쓰는 여자의 공간>은 독일의 출판편집자이자 작가인 타니아 슐리가 엮은 책이다. 작가는 창작하는 여성의 공간에 주목한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어떤 공간에서 탄생했을까?’ 책 속에는 작가가 추적한 서른다섯명의 여성 창작자의 공간이 담겨 있다. 버지니아 울프부터 토니 모리슨, 수전 손태그처럼 국내에서 알려진 작가도 있고, 조금은 낯선 작가도 있다. 한 꼭지마다 그들의 얼굴과 머문 공간이 사진으로 담겨 있다. 여자에게 허락된 공간이 집뿐이었던 시절, 브론테 세 자매는 부엌 식탁에 둘러앉아 글을 썼다. 그들은 한눈을 팔거나 차나 과자도 먹지 않고 쓰기에 집중했다. 첫째였던 샬럿 브론테는 식탁에서 <제인 에어>를 완성했다. 살럿은 여성임을 가리기 위해 ‘커러 벨’이라는 필명으로 1847년 책을 출간했다. 여행 작가였던 안네마리 슈바르첸바흐는 히틀러를 지지했던 자본가 집안을 벗어나 길 위에서 글을 썼다. 그녀는 세계를 떠돌며 차 안에서, 텐트에서 글을 썼다. 그녀는 사랑하는 친구 에리카 만에게 이런 편지를 남겼다. “사랑하는 에리카, 투쟁이나 고민, 광기가 담긴 글을 쓰면 위안이 될 뿐만 아니라 오직 너만의 길을 갈 수 있어.” 오븐에 머리를 넣어 자살한 비운의 작가라고 알려진 실비아 플라스는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으려고 계속 쓴 사람이다. 독박 육아와 가사에 지친 일상에서도 그는 글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방해받지 않고 글쓰기에 몰두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던 새벽에 집 안 곳곳에 쭈그려 앉아 글을 썼다. 책을 덮고 표지를 본다. 표지에는 쓰기에 몰두하는 한 여성이 있다. 흑백 사진 속 테이블에는 종이가 쌓여 있고, 그는 펜을 들고 노트에 무언가를 적고 있다. 살짝 보이는 옆얼굴을 통해 입을 다물고 펜을 움직이는 데 집중하는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그녀가 머문 공간이 허름한 창고인지, 쫓겨나기 직전의 집인지, 다락방인지, 호텔방인지, 길 위인지, 공공장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순간 그녀는 세계와 소통하고 있다. 그녀의 몸은 단단하게 뿌리 내린 나무처럼 고정되어 있다. 나는 나란히 그녀 곁에 앉는다. 누군가의 몰입하는 얼굴을, 공간을 보는 것만으로도 견고한 일상의 벽이 열린다. 자기만의 시간, 자기만의 공간. 그 시공간을 적극적으로 만들기로 한다. 하얀 종이에 단어 하나를 적는다. 조금씩 세계가 열린다. 집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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