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사상가 볼테르 열성 지지자
러시아 여제가 보낸 편지 수십편
종교억압 반대 ‘관용 정신’ 옹호
반봉건 전제군주의 이중적 면모
러시아 여제가 보낸 편지 수십편
종교억압 반대 ‘관용 정신’ 옹호
반봉건 전제군주의 이중적 면모
러시아 18세기 계몽전제군주 예카테리나 2세. 위키미디어 코먼스
예카테리나 2세 지음, 김민철·이승은 옮김 l 읻다 l 1만8000원 예카테리나 2세(1729~1796)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함께 18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계몽전제군주다. 표트르 대제(1672~1725)가 세운 러시아 제국의 제8대 황제이자 러시아의 마지막 여성 황제이기도 하다. 그 예카테리나 황제가 동시대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1694~1778)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책이 출간됐다. <예카테리나 서한집>은 유럽 계몽기 지식인과 전제군주의 친밀한 관계를 알려주는 사료이자 예카테리나라는 희대의 여성 권력자의 정신세계를 그려보게 해주는 자료다. 서신 왕래를 통해 형성된 당대 ‘문필공화국’ 또는 ‘편지공화국’의 실상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창문이기도 하다.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대제의 강력한 서구화 정책을 이어받아 러시아 제국을 반석에 올려놓은, 말 그대로 ‘철의 여인’이다. 러시아의 18세기는 표트르가 열고 예카테리나가 닫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러시아를 유럽 최강 제국으로 세운 이 여성이 독일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본명이 ‘조피 아우구스테 프리데리케 폰 안할트체르프스트’인 이 여성은 프로이센의 작은 공국 슈테틴의 공작 딸로 태어나 16살 때 러시아 황태자와 결혼했다. 러시아 황실 일원이 되자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바꾸고 종교도 개신교 루터파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바꾸었다. 1761년 남편이 황제(표트르 3세)가 될 때까지 예카테리나는 황궁에 갇혀 살다시피 하며 읽기와 쓰기로 고독을 견뎠다. 그 시기에 계몽사상의 화신과도 같은 볼테르의 글을 읽고 감격해 열렬한 볼테르 지지자가 됐고, 이어 디드로·달랑베르 같은 다른 백과전서파의 글도 탐독하기 시작했다. 예카테리나는 얌전한 독서가로 끝날 사람이 아니었다. 남편이 황제가 되자마자 예카테리나는 권력자의 본능을 발동해 허약하고 무능력한 남편을 쫓아내고 1762년 스스로 황제가 됐다. 이후 179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4년 동안 러시아의 외교와 내치를 이끌었다.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무스타파 3세와 벌인 전쟁으로 크림반도를 차지하고 흑해 항로를 확보한 것은 전쟁과 외교를 지휘하는 예카테리나의 실력을 명확히 보여준 사례로 꼽을 만하다. 후대의 러시아 시인 표트르 뱌젬스키(1792~1878)는 “위대한 러시아인(표트르 대제)은 우리를 독일인으로 만들고 싶어 했고, 위대한 독일인(예카테리나 2세)은 우리를 러시아인으로 만들었다”고 표현했다. 예카테리나는 프리드리히 2세와 함께 유럽 편지공화국의 가장 유명한 일원이기도 했다. 러시아 황제의 편지가 쉼 없이 날아간 곳 가운데 하나는 프랑스 계몽사상의 둥지였다. 예카테리나는 즉위 이듬해인 1763년부터 볼테르와 편지 왕래를 시작해 볼테르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778년 5월까지 편지를 주고받았다. <예카테리나 서한집>에는 이 시기에 예카테리나 2세가 볼테르에게 보낸, 40편 가까운 편지가 실려 있다. 또 이 편지들과 내용상 연관된, 달랑베르나 프리드리히 2세에게 보낸 편지도 함께 들어 있다. 이 편지 모음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볼테르와 예카테리나가 서로를 추어올리는 모습이다. 볼테르는 1763년 달랑베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달랑베르가 예카테리나의 초청을 거절한 것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교육하는 일을 승낙하는 영예를 누렸고 당신에겐 그것을 거절하는 영광이 있다는 차이를 제외한다면, 이 (예카테리나의 초청) 편지는 필리포스 대왕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낸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가 하면 예카테리나는 볼테르가 쓴 책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백과사전>을 읽으면서 내가 1천 번이나 말한 것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당신 이전에 이렇게 쓴 사람은 없으며, 당신 이후에 과연 당신 같은 사람이 있을지 무척 의심스럽다고요. 당신의 운문과 산문은 누구도 결코 능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편지에서 두 사람을 엮어주는 ‘계몽의 정신’은 우선 ‘관용의 정신’이다. 예카테리나는 볼테르가 <관용론>(1761)에서 개신교도라는 이유로 가톨릭교도들에게 핍박받고 죽임당한 칼라스 가족을 변호한 것을 두고 이렇게 쓴다. “억압당하는 결백한 이들의 수호자가 되는 것은 곧 불멸의 존재가 되는 일입니다. 당신은 인류 공통의 적에 맞서 싸웠어요. 미신, 광기, 무지, 억지, 나쁜 판관, 그리고 각각의 수중에 놓인 권력에 대항해서요.” 계몽군주의 ‘진보성’이 확인되는 대목이라고 할 만하다. 이 서간집에는 예카테리나가 바로 이 계몽군주로서 추진하던 ‘근대적 법전 편찬’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예카테리나는 1767년 러시아의 법률을 정비해 통일할 입법위원회를 각계각층 사람들로 꾸려 소집하고, 이 위원회에서 해야 할 일을 담은 <교서>를 집필했다. <교서>에서 예카테리나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1748)과 이탈리아 법학자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1764)을 드넓게 인용하고 여기에 황제 자신의 관용 정신을 덧붙였다. 입법위원회는 오스만 튀르크 전쟁으로 법전 완성을 보지 못한 채 해산됐지만, 그 활동의 결과는 러시아의 법률과 행정의 변화로 이어졌다. 편지에서 예카테리나는 <교서> 집필에 쏟은 열정을 강조하며 그 내용을 일부 소개하기도 한다. “사람들 사이에 다양한 신앙이 있는 거대한 제국에서 시민의 평화와 안정에 가장 해로운 잘못은 다양한 종교에 대한 불관용일 것이다.” 예카테리나가 이런 관용의 계몽 정신으로 당대의 진보적 사상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 계몽군주의 중간자적 성격과 연관이 있다. 계몽군주는 낡은 봉건사회를 극복하고 근대 시민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의 존재로서 봉건적인 교회·영주 세력을 제압하고 신흥 부르주아 세력을 끌어모으려 했다. 그런 역사적 지위가 봉건주의를 부정하는 부르주아 계몽 정신에 대한 뜨거운 관심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계몽군주의 목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왕권 강화였다. 계몽군주는 전제군주였다. 예카테리나 2세의 편지에서 계몽전제군주의 그런 이중적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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