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돌봄은 순환하며 원을 키운다

등록 2022-04-01 04:59수정 2022-04-01 08:48

[한겨레book]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고마운 마음
델핀 드 비강 지음, 윤석헌 옮김 l 레모(2020)

1935년생 미쉬카는 요양병원에서 삶의 최후를 기다린다. 그의 곁에는 오랜 이웃이었던 젊은 여성 마리와 언어치료사 제롬이 있다. 마리와의 인연은 수십 년 전 어린 마리와 마리의 젊은 엄마가 미쉬카의 윗집에 이사를 오면서 시작되었다. 조울증을 앓는 마리의 엄마는 집 안의 모든 문을 닫아걸고 온종일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마리는 돌봄의 사각지대에 홀로 방치되곤 했다. 그런 마리에게 돌봄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미쉬카다. 평생 혼자 살며 아무도,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미쉬카는 ‘살면서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를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는’ 경험을 했고,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이제 미쉬카가 노화로 집에 혼자 있을 수 없게 되어 요양병원에 입원하자 마리가 주기적인 면회를 통해 기꺼이 미쉬카의 곁을 지킨다.

잡지사와 신문사에서 교정교열자로 일하며 평생 언어를 다뤄왔던 미쉬카는 빠른 속도로 언어를 잃어가는데, 언어치료사 제롬은 주말마다 미쉬카를 찾아와 그 상실의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고자 분투한다. ‘말들은 상처를 입혀요. 욕설, 모욕, 비난, 빈정거림, 질책은 흔적으로 남아요. 지워지지 않아요.’ 소설 속 문장처럼 언어는 상처를 가하는 무기가 되기도 하지만 다정한 마음,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는 그릇이 되기도 한다. 미쉬카는 언어치료보다 제롬과의 사적인 대화를 원하고, 그 과정에서 제롬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받았던 상처를 보듬어주려고 애쓴다. 두 사람의 대화는 간혹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고 미쉬카의 어휘는 빠른 속도로 망가지며 허술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침내 미쉬카가 제롬의 이름을 기억하고 어눌한 발음으로 ‘거마워요’라고 말할 때 우리는 언어의 본질이 자음과 모음의 형식적 구성에 있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통렬하게 깨닫는다.

미쉬카와 마리, 미쉬카와 제롬의 관계는 얼핏 서로 보살핌을 주고받고 다정하고 고마운 마음을 갚는 ‘쌍방향’ 관계로 보인다. 그러나 소설 속 돌봄의 출발점으로 보이는 미쉬카에게도 대가 없이 보살핌을 받은 경험이 있다. 2차 대전 당시 유대인이었던 어린 미쉬카를 몰래 숨겨주고 3년이나 보살펴준 부부가 있었던 것. 성도 모르고 이름만 겨우 기억하는 그 부부를 찾아 고마움을 전하는 것이 노년의 미쉬카에게 남은 마지막 과제이자 소망이다. 이렇듯 어린 미쉬카부터 노년의 미쉬카까지 이어지는 삶의 궤적을 훑어보면 돌봄의 흐름은 쌍방향 주고받기가 아니라 타인에서 또 다른 타인으로 이어지는 순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처음 두 사람이 맞잡았던 손이 세 사람, 네 사람의 손으로 확장되며 함께 이룬 원의 크기가 점점 커지고 그 원 안에 품을 수 있는 돌봄 대상의 수 역시 함께 커지는 것이야말로 순환하는 돌봄의 본질적 효과가 아닐까.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다행한 일이겠지만 미쉬카가 처음 마리를 만났을 때처럼 보살핌을 제공하는 경험 역시 ‘정말 큰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가, 번역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오징어 게임2’ 배우 이주실 별세…위암 투병 석달 만에 1.

‘오징어 게임2’ 배우 이주실 별세…위암 투병 석달 만에

큰불 난 한글박물관, 정조 편지 등 소장품 8만9천점 전부 이송 2.

큰불 난 한글박물관, 정조 편지 등 소장품 8만9천점 전부 이송

‘믿음’이 당신을 구원, 아니 파멸케 하리라 [.txt] 3.

‘믿음’이 당신을 구원, 아니 파멸케 하리라 [.txt]

[꽁트] 마지막 변신 4.

[꽁트] 마지막 변신

긴 연휴, 함께 읽고 싶은 ‘위로의 책’ 5.

긴 연휴, 함께 읽고 싶은 ‘위로의 책’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