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페스트의 밤>의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무크가 한국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이 작품을 번역한 이난아 한국외대 중앙아시아연구소 전임 연구원이 <한겨레>를 비롯한 한국 언론의 서면 질문을 취합해 지난 16일 파무크와 줌 인터뷰를 했다.
오르한 파무크가 지난 16일 번역자 이난아씨와 화상 인터뷰를 하고 있다. 민음사 제공
―40여년간 전염병을 소재로 한 소설을 고민했다고 들었는데 그 계기나 배경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하필 1901년의 페스트를 다룬 이유가 무엇인지요? 오늘날 다시 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배경도 궁금합니다.
“저의 소설 <고요한 집>에는 오스만 제국 시기에 창궐한 페스트를 설명하는 역사가 파룩이 등장하지요. 그리고 역사 소설 <하얀 성>에도 페스트와 관련된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정말 오랜 세월 전염병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형이상학적인 것을 사고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이유입니다.
그다음에는 서양인 일반 여행가들이 쓴 회고록에서 이스탄불에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시민들이 그다지 예방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 터키인, 무슬림들, 아시아인들이 페스트에 대해 운명론자 같은 태도를 취한다고 쓴 것들을 읽었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 <오리엔탈리즘>에서도 영향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래서 페스트를 소재로 한 역사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었지요. 1894년에 시작된 제3차 페스트 유행 시기에 아시아에서 수천만명이 사망했습니다. 특히 중국과 인도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지요. 하지만 유럽과 미국에서는 소수가 사망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동서양 문제를 다루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페스트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답니다.
최근 10년간 이 주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동양주의, 운명주의에서 관심이 멀어지고, 방역 적용의 어려움, 방역과 격리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저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동시에 오스만 제국 그리고 영국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제국의 붕괴 시기와 맞아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주제와 함께 저는 <페스트의 밤>에서 페스트를 민족주의의 부상, 제국의 붕괴 후 작은 국가들의 탄생, 그리고 이 모든 사회적 변화를 촉발시키는 것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중세에는 페스트 전염병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예컨대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격리에 대한 반란, 중세 이탈리아에서의 격리에 대한 반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소설 집필 중 코로나19가 전세계에 퍼졌을 때 현실이 소설과 닮아 오히려 소설의 재미를 반감시킬까 우려는 없었는지요? 혹은 현실과 맞추려고 한 부분이 있나요? 그리고 코로나19 때문에 소설을 수정한 부분은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네, 그런 우려를 많이 했습니다. 책을 읽은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소설에선 하즈(성지순례자)들이 격리 조치를 거부하는 반란 사건이 나옵니다. 먼저 제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2020년 3월15일에 뉴욕에 있다가 다른 사람들처럼 허겁지겁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터키 신문에서 성지순례를 하고 돌아온 터키인 하즈들을 격리시키는 과정에서 사건이 발생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관계자들이 철조망으로 둘러친 장소에 그들을 가두는 등 함부로 대하자 하즈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는 뉴스가 신문 1면에 실렸습니다. 바로 <페스트의 밤>에 묘사된 그것과 똑같았지요. 저는 서둘러 터키에서 제가 쓰고 있는 소설에 대해 인터뷰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르한 파무크가 이러한 사건에 영향을 받아 급하게 소설을 썼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뉴욕 타임스>에 긴 글을 썼습니다. 이 기고문은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다른 나라에서도 나왔지요. 제가 지난 3년 반 동안 전염병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있으며, 페스트와 격리, 방역 등의 문제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죠. 저는 전세계에 전염병이 확산되니까 오르한 파무크가 소설을 썼다고 생각되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소설에서 코로나19 때문에 수정한 부분에 대해 언급하자면, 제가 소설에서 격리 부분을 너무 장황하게 서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집요하게, 남들 모르게 ‘바늘로 우물 파듯’ 발견했던 부분들이 갑자기 사방에 알려졌고, 신문에서 언급하는 사건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축소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많이 축소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 주제에 대해 익숙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부터 10년, 30년이 지나면 사람들이 또 이 주제를 잊겠지요. 사람들이 오랫동안 내 소설을 읽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지나치게 많이 축약하지는 않았습니다.”
―1901년 무렵의 페스트를 포함해 과거 전염병에 대해 방대한 자료 조사를 한 것으로 압니다. 어떻게 취재와 조사를 했는지, 어떤 식으로 작품에 반영됐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영국의 식민지에 있던 영국 의사들이 뭄바이와 홍콩에서 쓴 보고서를 많이 읽었습니다. 이 보고서들을 여러분들도 인터넷에서 찾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그 보고서들을 보면 이 의사들은 영국에 있는 상관 의사에게 회고록을 쓰듯 당시 상황들을 써 보내고 있습니다. 어디에 갔고, 어디를 소각했고, 사람들이 아주 무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다 등. 영국 의사들의 보고서, 터키 의사들의 회고록, 그리고 물론 과거 터키 주지사들의 정치 회고록 등을 읽고 또 읽으면서 이 소설을 썼습니다.”
―소설과 지금은 약 100년 넘는 간극이 있는데 전염병에 대응하는 인간의 반응이나 상황(소설 속 인물들이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해나 신념, 자신의 위치에 따라 페스트를 각각 다르게 인식하고 대립하고 이런 갈등 상황에서 더 큰 혼란을 초래하는 모습) 등이 많이 닮았습니다. 이를 통해 현시대 우리의 모습에 대해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혹은 오히려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어떤 것은 비슷하고 어떤 것은 비슷하지 않습니다. 먼저 비슷한 점들을 말하고 싶습니다. 매번 죽은 사람을 제외하고 정부, 주지사, 군수, 대통령, 총리는 먼저 전염병을 부인합니다. ‘아, 여기에서 사람이 죽었어요?’ 그러면 ‘뭐 감기에 걸려 죽었겠지’라고 말하면서 믿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당장 조치를 취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현재의 편한 상태 혹은 질서가 흐트러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반응입니다. 그러면 전염병은 빠르게 확산되고 사람들이 죽기 시작합니다. 사망자 수가 늘어나고, 사람들은 이 전염병을 누가 가져왔지, 중국인들, 일본인들이 가져왔나, 기독교인들, 무슬림들이 가져왔나, 유대인들, 인도인들이 가져왔나 하면서 뒷담화를 시작합니다. 소문이 더 확산되지요. 당시는 지금처럼 미디어도, 언론도, 인터넷도 없었기에 소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죠. 그런데 현재에도 역시 소문이 생겨나는 것을 이해하기는 아주 어렵답니다.
소문들이 계속 무성해지는데도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이에, 주지사들, 방역관들은 사람들의 반응에 맞서 강경하게 대처하기 시작합니다. 권위적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이 소설을 쓸 당시 터키의 정치적 상황도 약간 권위적으로 변하고 있었죠. 민주적인 것들이 희석되는 것 등의 주제들도 함께 다루고 싶었습니다.
항상 다음과 같은 상황이 반복됩니다. 방역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닮아 가죠. 자신들의 삶이 힘들어지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하지요. 페스트, 콜레라, 황열병 등을 막론하고 장기간 지속된 방역에 지쳐 반발하기 시작합니다. 이 반발은 방역에 맞선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는 약간 힘듭니다. 예를 들면 저는 러시아, 폴란드에서 발병한 콜레라 반란에 대해 읽은 적이 있습니다. 중세 이탈리아에서의 방역, 격리 관련 반란들에 대해 읽은 적이 있는데, 이런 것도 제게 다양한 생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과거와 비슷하지 않은 점에 대해 말하자면,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을 켜면 우리 앞에서 사람들이 음압기를 달고, 산소 공급을 받으며 죽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코로나바이러스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페스트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두려워했습니다. 왜 두려워했을까요? 바로 우리가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시체를 가득 실은 트럭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도에서 공원에 가득 찬 시체들을 태우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장면을 보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과거엔 사람들이 초기 단계에서 이런 것들을 보지 못했답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요. 대니얼 디포의 <페스트>에는 페스트가 창궐한 시기에도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둘 다 페스트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페스트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지요. ‘북쪽은 어때? 북쪽에도 페스트가 있어?’라고 묻고 ‘남쪽은? 남쪽에도 페스트가 있어?’라고 묻는 등 이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존스 홉킨스 대학의 자료 지도를 보면 어디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했다면 지금은 알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거지요.”
―시대를 막론하고 전염병 대유행에 있어 민족주의, 종교, 소문, 거짓 정보 등이 바이러스 대응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특히 21세기 디지털 환경에서는 거짓 정보가 넘쳐나는데 이는 인류를 더 취약하게 만들까요, 아니면 거짓 정보를 가려내는 기반이 돼 줄까요?
“소셜 미디어, 인터넷이 등장하자 우리 모두는 이를 사용하기 시작했죠. 모두가 실증적이며, 계몽적이며, 낙관론에 휩싸이게 되었지요. ‘와 좋은 세상이네, 우리 모두 각자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어, 모두가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야, 신문을 사서 보지 않고도 정보를 얻을 수 있네, 세상은 서로 아주 잘 소통하게 될 거야, 평화가 올 거야’ 하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되지 않았지요.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자신과 우호적인 사람들, 친구들의 말만 듣기 시작했지요. 신문들은 모든 정보를 약간 체에 거르고, 점검하기 때문에 그래도 비교적 객관적인 정보를 내보내지요. 하지만 이제 객관적인 정보는 사라졌죠. 러시아는 푸틴의 미디어를 지켜보고, 터키인들은 터키의 미디어를 지켜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페이스북에 쓴 것, 말한 것들을 믿습니다. 기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가서 취재한 기사들을 믿는 대신 친구가 페이스북에 쓴 헛소문을 믿지요. 소셜 미디어,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 이런 결과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되어 버렸지요.(웃음)”
―전염병에 관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권력의 허영심, 혁명과 독립, 그리고 국가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소설에는 20세기 초반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 휘둘리는 오스만 제국과 당시 지중해 세계,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공존하는 세계 등이 나오는데 왜 전염병이 이러한 주제와 연결된다고 생각했는지요? 이를 통해 현재의 세계에 던지고자 하는 작가의 메시지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 소설은 한편으로 페스트의 창궐 당시 인간 영혼의 반응,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는 없었지요. 다른 한편으로 이 소설은 오스만 제국 말기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제 소설은 파노라마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특징이 있어요. 오스만 제국 말기의 세세한 그림이지요. 제 생각에 오스만 제국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붕괴되지 않았습니다. 로마 제국이 이방인에 의해 붕괴되지 않았던 것처럼. 오스만 제국의 내부 갈등으로 인해 쪼개졌습니다. 제국 내 슬라브 민족주의, 그리스 민족주의, 불가리아 민족주의, 아랍 민족주의, 조지아 민족주의 등 수많은 민족주의가 오스만 제국을 붕괴시켰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문제도 있었고요. 기본 종교가 이슬람이었던 제국의 일부 영토에서 주민의 90%가 기독교인이었던 곳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국의 내적 갈등이었지, 서구 제국주의가 오스만 제국을 붕괴시킨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제 소설에서 페스트 문제를 제외하고, 오스만 제국 말기의 풍경을 슬픈 시선으로 바라보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할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관료, 파샤(문무 고위직), 군수, 의사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삶도 소설에 반영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민게르섬 사람들에게 양자택일의 선택지가 아닌 독립국가라는 새 길을 열어준 이유가 뭔가요? 페스트와 오스만 제국의 몰락과 민게르섬의 독립을 매치시킴으로써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는지요?
“그 이유는 당시 부상하고 있던 민족주의의 영향 때문입니다. 거대한 제국의 궁전에서 나오지 못하는 두려움에 휩싸인 파디샤가 제국을 통치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거대한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전보를 치면서 국가를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소설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것도 볼 수 있지요. 그의 고민은 민게르섬에 사는 제국민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궁전과 자신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술탄 압뒬하미트는 영국, 프랑스, 독일이 ‘너 이제 왕위에서 내려와,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야겠어’라고 할까 봐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구 열강들이 원하는 것을 하고, 민게르 제국민이 원하는 것은 하지 못하지요. 즉, 이 소설은 민족주의의 뿌리에 관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대학교 신입생들은 민족주의가 의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종교인가, 역사인가, 지리적 요인인가, 언어인가 등을 배우지요. 저의 답변은, 민족주의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는 언어라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한 민족을 생성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언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도 합니다.”
―페스트와 오스만 제국의 몰락과 민게르섬의 독립을 매치시킴으로써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는지요?
“저는 고립된 공간이라는 주제를 좋아합니다. 저의 소설 <눈>(2002)에서도 폭설이 내려 카르스라는 도시가 고립됩니다. 고립된 곳에서는 역사가 빠르게 진행됩니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서 200년 동안 진행된 혁명이, 민게르섬에서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됩니다. 혹은 <눈>에서 도시가 고립되고, 어떤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실 <페스트의 밤>은 어떤 면에서 소설 <눈>과 유사합니다. 그런데 사실 <페스트의 밤>을 <눈>보다 먼저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소설 <눈>을 쓸 때 이미 머릿속에 있던 <페스트의 밤>의 작은 요소들을 가져와 <눈>에 적용했지요. 이 두 소설의 공통점은 고립된 공간이라는 점, 그리고 정치 소설이라는 것이지요.”
―작가 자신이 아닌, 미나 민게를리라는 화자를 만들어 이야기를 들려준 이유는 무엇인지요?
“많은 것을 서술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건들을 요약하는 어떤 서술자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만약 이 모든 사건을 곧장 대화, 말로 천천히 설명한다면 어마어마한 분량이 되었겠지요. 미나 민게를리는 사건들을 여과하고, 요약해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인터뷰] 소설 ‘페스트의 밤’ 작가 오르한 파무크 ②(
https://bit.ly/3IFkeZ7)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번역 이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