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강명관의 고금유사
강명관의 고금유사
1557년(명종 12) 5월 단양군수 황준량은 상소를 올려 단양군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보고했다. “한 집이 1백 호의 국역을 지고, 한 장정이 1백 명의 일을 맡게 되어, 가난한 자는 이미 곤궁해졌고, 곤궁한 자는 이미 병들었습니다. 그 결과 처자식을 끌고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단양군 백성들이 흩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문제는 심각했다. 단양군 국역을 부담하고 있는 민호(民戶)가 40호에 불과했던 것이다.
황준량은 상소에서 과도한 수탈 10가지를 꼽았다. ①각 관사에 바쳐야 할 서까래 재목이 4백 개, 산목(散木)이 수만 개다. 운반을 할 소와 말도 모두 죽어 산 넘고 계곡 건너 40호의 민호가 수송할 방법이 없다. ②종이 만드는 노동은 다른 일보다 힘든데, 공납할 종이가 단양군에 과도하게 배정되어 있다. 풍저창·장흥고 종이는 원래 배정된 것이지만, 그 외 호조·교서관·관상감의 공납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③백성들을 사냥에 동원하고, 사냥에 실패하면 백성들이 곡식을 내어 짐승을 사서 바쳐야만 한다(바쳐야 하는 짐승은 노루가 70마리, 꿩이 200마리가 넘는다).
단양에 배정한 ④야장(冶匠) ⑤악공(樂工) ⑥보병(步兵) ⑦기인(其人) 등의 수가 너무 많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러니 결국에는 대신 포(布)를 바쳐야 한다. ⑧병영(兵營)에 사슴가죽, 노루가죽을 바쳐야 하고, 큰사슴과 소가죽의 값을 대신 내야 한다. ⑨공주·해미(海美)·연풍(延豐)·영춘(永春)·황간에 배정된 공물과 사노비·기인 등을 단양현에 옮겨 부과하고 있다. ⑩이름도 모르는 약재를 촌백성들에게 배정했기에 결국 포목으로 대신 내게 된다. 웅담·사향·백급(白笈)·인삼·복령·지황은 너무나 비싼 약재이고, 여기에 뇌물까지 바쳐야 한다. 이상의 10가지의 신역(身役) 혹은 그것의 대가(代價)와 공물(貢物)은 전술한 바와 같이 40여 호에 배정된 것이었다. 이외에도 허다한 수탈의 명목이 있었다.
상소에 충격을 받은 조정은 10년 동안 공부(貢賦)와 잡역을 면제하기로 결정하였다. 물론 단양현에 한정되는 것이며 다른 고을은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관(史官)의 생각은 달랐다. “한 고을의 폐단을 들여다보면 3백60고을 중 안 그런 곳이 없다. 백성의 목숨이 끝장이 났구나.”
연산군의 폐정(廢政)은 조선이 무너지는 신호였다. 중종반정으로 정권의 한 축을 담당했던 사림(士林)은 개혁정치를 내세웠다. 하지만 그 개혁정치에 문제가 있었다. 사림의 일각에서 1518·1519년 소수가 토지를 독점하고 농민이 토지에서 쫓겨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전법(限田法)·균전법(均田法)의 시행을 주장했지만 개혁세력의 본류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사림들이 열중했던 것은 모든 인간의 ‘도덕화’였다. 조광조가 최선봉에 서서 <소학>과 <삼강행실도>를 인쇄해 뿌렸다. 하지만 모든 인간의 도덕화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사림은 기득권 세력의 저항으로 실각하였다(기묘사화). 뒷날 사림들이 조정에 돌아왔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들 역시 기득권과 타협한 새 기득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단양군의 붕괴는 그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었다. 개혁해야 할 때를 놓치면 백성만 처참한 삶을 살게 되는 법이다.
인문학 연구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