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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의 기폭제 된 그 책

등록 2022-03-18 08:13수정 2022-03-18 10:06

[한겨레BOOK]
미국 문화비평가 제임슨 1991년작
‘후기자본주의 문화 현상’
포스트모더니즘 이중적 관점 제시
30여년 만에 뒤늦게 한국어 출간

미국 문화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위키미디어 코먼스
미국 문화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위키미디어 코먼스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
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임경규 옮김 l 문학과지성사 l 4만2000원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은 1980년대에 본격화해 한 세대 가까이 전 세계 지식계를 휩쓸었다.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현상이 지식계의 최대 쟁점이 되는 데 동력 노릇을 한 것이 미국 문화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1984년 논문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다. 이 논문은 1991년에 몇 편의 관련 논문 그리고 200쪽에 이르는 결론과 함께 묶여 같은 이름의 책으로 출간됐다. 이 책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은 20세기 후반 미국 대중문화를 넘어 현대 자본주의 문화 전반을 설명하는 용어로 올라섰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시대의 유행어로 만든 그 책이 30여년 만에 번역돼 한국어 독자에게 다가왔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뜻 그대로 하면 ‘모더니즘에 뒤이어’ 등장한 문예 사조를 가리킨다. 제임슨은 자본주의 등장 이후의 근대 문예 사조를 리얼리즘과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나눈다. 리얼리즘이 19세기 문예 사조라면, 모더니즘은 대체로 20세기 초반에 세력을 떨친 문화 전반의 사조를 가리킨다. 회화에서 파블로 피카소, 문학에서 제임스 조이스, 철학에서 실존주의 따위가 모더니즘의 주류를 이룬다. 이 모더니즘이 1950년대 말 이후 미국 교과서에 실려 정전(카논)의 권위를 얻자 이 사조에 반항해 일어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미술에서 앤디 워홀과 팝아트, 음악에서 존 케이지, 영화에서 장뤼크 고다르, 문학에서 누보로망처럼 새로운 미학적 태도를 품은 문예 흐름을 가리키는 말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결정적인 차이 가운데 하나를 대중의 수용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모더니즘 작품들은 당대 부르주아지의 격렬한 거부를 불러일으켰다. 피카소의 그림이나 조이스의 소설은 비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소변기를 미술 작품으로 내놓은 마르셀 뒤샹의 <샘> 같은 작품을 부르주아 대중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처럼 당대 지배 질서의 거부를 산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배 문화에 수용돼 서구 사회의 공식 문화와 한 묶음이 됐다고 제임슨은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 양식이 자본의 호응을 받아 유별나게 번창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제임슨의 분류법에서 더 주목할 것은 근대 이후 세 가지 문예 사조가 근대 자본주의 탄생 이후 세 발전 단계에 상응한다는 점이다. 리얼리즘이 초기 시장자본주의 단계에 상응한다면, 모더니즘은 독점자본주의 혹은 제국주의 단계에 상응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자본주의(Late Capitalism)에 상응한다. 후기자본주의는 경제학자 에르네스트 만델이 1972년 저서에서 주장한 것인데,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를 지나 이제 종말을 앞에 둔 최후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진단을 담은 용어다. 후기자본주의는 앞 시대 자본이 식민화하지 못한 것을 모조리 식민화함으로써 앞 시대보다 훨씬 더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가 된다고 제임슨은 강조한다. 이를테면 자본이 광고 산업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까지 장악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의 더 결정적인 차이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화가 경제적 토대로 스며들어 둘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졌다는 데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문예는 건축 분야에서 명료하게 드러나듯이 자본과 분리되지 않는다. 과거 모더니즘 예술은 상품화를 격렬히 거부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은 상품화에 대한 반감이 없고 스스로 상품이 된다. 예술이 경제와 통합된다. 그러다 보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문화는 앞 시대 문화가 지녔던 ‘상대적 자율성’을 상실하고, 자본의 지배에 저항할 ‘비판적 거리’를 확보할 수 없게 된다고 제임슨은 지적한다.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서 제임슨은 카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을 묘사하는 방식을 끌어들인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발전을 긍정적으로 사유함과 동시에 부정적으로 사유하라고 촉구했다. 자본주의는 인류에게 나타난 최고의 것이자 최악의 것이다. 자본주의의 명백한 해악과 자본주의에 잠재된 해방의 힘을 동시에 보는 것, 이것이 마르크스의 관점이다. 제임슨은 마르크스의 이 관점으로 후기자본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자본주의가 낳은 필연적인 문화 양식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진보이자 파국’으로 보는 ‘변증법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을 긍정하면서 부정하는 제임슨의 이중적 태도가 나타난다.

미국 문화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위키미디어 코먼스
미국 문화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위키미디어 코먼스

그렇다면 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제임슨은 문화가 경제에 포위된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포위된 중에도 세계를 총체적으로 보는 우리의 눈을 키워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인식의 지도 그리기’(cognitive mapping)라는 용어로 제임슨이 제안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세계 인식의 지도를 그림으로써 우리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파악할 수 있고, 나아가 후기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넘어설 가능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다. 하지만 제임슨의 이 전망은 너무 막연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보다 더 중요한 비판이 탈식민주의 진영에서 나왔음을 이 책의 ‘옮긴이 후기’는 알려준다. 아이자즈 아마드 같은 탈식민주의 이론가는 제임슨의 주장이 ‘백인 남성’의 관점에서 나온 서구중심주의적인 것이라고 매섭게 공격했다. 하지만 제임슨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계급 문제를 앞세우고 경제적 토대에서부터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고수한다. 그런 관점은 인종·젠더·민족 같은 저항의 범주를 수용할 여지를 좁힌다. 제임슨이 이 책의 결론에서 ‘미시정치학’과 ‘정체성 정치’를 ‘극히 포스트모던한 현상’이라고 진단하고 비판하는 데서 그런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좌파 내부의 논쟁은 이후 차츰 포스트모더니즘 영역을 넘어 계급에 기반을 둔 보편주의 정치학과 소수자에 기반을 둔 차이의 정치학 사이의 논쟁으로 옮겨간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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