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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판에서 실종된 이대녀들 스스로 새 정치판 만들자는 뜻이죠”

등록 2022-03-13 19:19수정 2022-03-15 19:42

[짬] 페미니즘 활동가 신민주·노서영·로라

<판을 까는 여자들> 저자들. 왼쪽부터 신민주, 로라, 노서영씨.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판을 까는 여자들> 저자들. 왼쪽부터 신민주, 로라, 노서영씨.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판을 까는 여자들>(한겨레출판). 20대 여성 셋이 “환멸나는 세상을 뒤집을 ‘이대녀’들의 목소리”라는 부제를 달아 최근 펴낸 책이다.

책 기획자이자 공동 저자인 신민주씨는 2020년 21대 총선 지역구 최연소 후보였고 소수정당 의원 보좌진으로도 일했다. 다른 저자 노서영씨는 대학 페미니스트단체에서 상근자로 활동했고 지금은 기본소득당 여성주의 의제기구 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기본소득당 대선 후보 유세팀장도 지냈다. 또 다른 필자 로라(필명)는 대학 시절 학과 대표 등을 하며 페미니즘 활동을 했고 지금은 온갖 분야의 ‘덕질’을 하는 자타공인 ‘오타쿠’란다.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를 꿈꾸고 있다는 세 저자를 대선 이틀 뒤인 지난 11일 오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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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을 까는 여자들> 표지

‘지난해 4월 서울시장 보궐 선거 이후 우리는 이대녀(20대 여성)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선거 직후 정치권에서는 이대남(20대 남성) 표심을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우리는 실종되어 버린 이대녀들이 바라는 정치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이 책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대녀로 산다는 것’과 ‘백래시(성평등에 반대하는 흐름)에 맞서다’, ‘우리가 가진 이름으로’ 3부로 구성된 책은 대학과 사회에서 페미니즘 활동가로 살아온 세 저자의 체험에서 얻은 농밀한 이야기들이 담겼다. 셋은 모두 성균관대 동문이다.

신민주씨는 최연소 후보로 21대 총선에 도전했을 때 두 차례나 자신의 벽보만 찢기는 ‘테러’를 당했다. ‘n번방 사건’ 관련 피켓을 들었던 자신의 동료 운동원은 한 야당 후보에게서 ‘나는 2번방인데 2번 000’라는 부적절한 ‘농담’까지 들었단다. 의원실 8급 비서로 일할 때는 ‘국회의원 여성 비율 19%, 정책과 사업을 총괄하는 4급 보좌관 여성 비율 8.1%’라는 국회 현실의 벽에 가로막히면서 왜 정치 현안이 50대 남성의 구미를 당기는 것으로만 이뤄지는지 몸으로 깨달았단다. 노서영씨는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과 같이 이번 대선에서 활개 치는 백래시를 4년 전 자신이 대학에서 겪은 좌절과 겹쳐 놓았다. 그는 대학 내 성평등을 위해 총여학생회장 후보로 나서려다 이에 맞서 일부 학생 대표자들이 내놓은 ‘총여학생회 폐지’ 투표가 가결되는 바람에 “한동안 폐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단다. 그는 “총여학생회 폐지 전후로 사회의 백래시는 심화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를 20대 젠더 갈등이 아닌 심각한 사회문제로 해석하고 합의하는 데 실패했다. 성평등 사회를 위해서는 더 많은 권한과 예산이 여가부와 같은 성평등 기구에 주어져야 한다”고 했다.

노씨와 함께 총여학생회 폐지 반대 투쟁을 한 로라는 ‘페미니스트들의 연대의 장’으로 기능하는 ‘트위터’의 순기능을 보여주는 한편 언론의 ‘커뮤니티 받아쓰기’가 어떻게 여성 혐오로 이어지는지도 짚었다. “언론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실체도 없는 논란을 받아 쓰면서 여성 혐오를 키우고 있어요. 양궁 국가대표 선수 안산의 헤어 스타일도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 ‘커뮤니티 받아쓰기’ 보도로 결과적으로 안 선수에게 위협적인 상황을 만들었잖아요?”

이들에게 먼저 ‘판을 까는 여자들’이 뭔 말인지 물었다. “누군가 이대녀를 대변하길 바라지 말고 우리 스스로 정치 목소리를 내자는 취지로 민주 언니가 제안했어요. 저 역시 지금보다 더 많은 여성이 정치 현장에 들어가 자신들이 원하는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를 위해선 제도적 지원이 꼭 필요해요.”(로라) “저한테는 기존 판을 뒤집고 새 판을 깐다는 의미가 커요. 이십대들이 권력자에게 ‘이거 해주세요’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정책이나 메시지도 만들고 유세도 하는 거죠.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직접 하는 데 방점이 있어요.”(노서영) 어떻게 판을 깔 수 있느냐는 물음에 신씨는 “정당 주요 직책이나 의원 보좌진의 여성 할당제 그리고 정당과 국회 내 성별 임금공시제와 성평등 교육 강화, 정당 내부의 청년 여성 정치인 육성 등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판을 까는 여자들’ 함께 기획해 펴내
“환멸나는 세상을 뒤집을 목소리” 부제
21대 총선 지역구 최연소 후보 출신
기본소득당 여성주의 의제 위원장
대학 때부터 여성운동 나선 ‘오타쿠’
“사회 전반 ‘성평등 합의 수준’ 개선”

노씨는 이번 대선 결과를 보며 “이미 있는 판의 활용도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들었다”고 했다. 신씨는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한 윤석열 후보 당선 소식에 큰 두려움이 밀려왔단다. “티브이에서 ‘윤석열 당선 유력 자막’을 보면서 ‘앞으로 5년 어떻게 살지’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젊은 여성들은 이재명 후보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여성 혐오적인 녹취록 육성이나 남초 커뮤니티에 올린 게시글 때문이죠. 그런데 이번에 이대녀들이 전략 투표를 했어요. 선거운동 마지막 순간에 ‘1번 몰아주자’는 여론이 높아지더군요. 거기에는 ‘n번방 추적단 불꽃’ 활동가 박지현씨가 유세차에서 ‘우리 다 같이 이깁시다’고 외치는 영상이 크게 작용했어요. 자기 이야기를 해주는 여성의 존재가 크게 다가온 거죠. 거기서 이대녀들이 ‘민주당이 젊은 여자에게 기회를 주는 정당이 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한 것 같아요.”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이대녀들이 몰아줬는데도 이기지 못한 것에 민주당은 반성해야 합니다. 민주당은 야당의 여가부 폐지 주장에 제대로 반박도 못 하다 선거 2주 전에야 친여성 행보를 했어요.” 로라는 자신이 강하게 소신투표를 주장해왔지만 이번 이대녀의 전략 투표에 공감하는 마음도 컸단다. “권력을 위해 여성 혐오를 이용하는 이준석 같은 정치인이 더 큰 힘을 갖게 되었을 때의 두려움이 젊은 여성들에게 그만큼 컸다고 생각합니다.”

왼쪽부터 신민주, 로라, 노서영씨.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왼쪽부터 신민주, 로라, 노서영씨.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노씨는 책에서 “대학 신입생 사이에 페미니즘은 그 어떤 사안보다 논쟁적이고 정치적으로 여겨져 그 누구도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볼드모트(<해리포터> 시리즈의 악당)가 되었다”고 썼다.

‘사회 구조적 성차별을 없애자’는 페미니즘이 젊은이들 사이에 금기어가 된 이유라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하자 노씨는 “정치 탓이 크다”고 답했다. “기성 정치인들이 용기가 없어요. 철학 부재이죠. 성차별 문제를 두고 젠더 갈등이라고 뒷짐만 지어요. 언론도 마찬가지죠. 저는 ‘일베’와 ‘메갈’(여성 혐오를 그대로 남성에게 돌려준다는 미러링을 전략으로 삼은 커뮤니티 사이트)은 같지 않다고 대중 앞에서 말할 수 있는 정치인이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백래시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로라는 국가가 여성 혐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점을 꼽았다. “얼마 전부터 청년들 삶이 힘들다고 흙수저나 헬조선 담론이 나왔잖아요. 그런데 이게 여성 혐오로 가더군요. 남자들이 힘든 게 여자 탓이라고요. 놀이문화처럼 여성 혐오가 이뤄지기도 했어요. 이런 굴절혐오(자신보다 권력이 많은 사람에게 불만을 가지면서도 권력이 적은 사람을 혐오하는 현상)를 국가가 심각하게 받아들여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그냥 남자와 여자의 싸움으로만 방관했죠.”

하지만 한국 사회의 이런 백래시 현상에도 ‘성평등에 대한 사회의 전반적 합의 수준은 조금씩 올라가고 있다’는 데 셋은 동의했다.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이 많아지고 지식도 생기니 여기에 ‘입 다물라’는 반발도 더 커지는 것 같아요.”(노서영)

마지막으로 성평등 사회로 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게 뭔지 물었다. “20대에서도 더 가난한 여성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유를 가지려면 돈이 필요해요. 그런 측면에서 기본소득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노서영) “법과 제도도 중요하지만 사회 구성원들이 성평등 문제에 대해 함께 생각을 나누고 성찰하는 기회를 얻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대학 시절 학회나 학생회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눴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의 차이가 크더라고요.”(로라)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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