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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여성의 분노가 세상을 바꿀 것이다!

등록 2022-03-11 05:00수정 2022-03-11 09:14

분노는 불의에 대항하는 제1방어선
여성의 분노 ‘통제’해온 가부장제 사회
억누르지 않고 분노해야 변화시킬 수 있어

우리의 분노는 길을 만든다
소라야 시멀리 지음, 류기일 옮김 l 문학동네 l 1만9500원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고, 화가 난 상태에서 말하면 나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에 으레 후회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나는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다. 준비가 되면 그때 이야기하겠다.”

2017년 미국 할리우드에서 거물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을 시작으로 권력 있는 남성들의 성적 괴롭힘과 성폭행 행각이 폭로됐을 때,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인 배우 우마 서먼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명 배우인 그가, 그것도 영화 <킬 빌>에서 거침없는 분노를 폭발시키며 복수극을 펴는 강인한 여성을 연기했던 그가,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가 정확히 말한 대로 모든 여성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여성은 결코 ‘좋은 여성’이 될 수 없으며 어떤 형태로든 불이익을 당한다는 것을. “예민하다” “유별나다” “짜증난다” “비이성적이다” 같은 부정적인 평가뿐 아니라, 때론 분노의 대가로 언제든 폭력과 공포까지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이 세상은 도저히 분노하지 않고선 배길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여성들에게 잔뜩 안겨주면서도, 정작 그들이 분노하는 것은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활동가이자 비평가인 소라야 시멀리(56)는 2018년에 펴낸 첫 책 <우리의 분노는 길을 만든다>에서 이처럼 부당한 현실을 만들어온 젠더불평등 구조를 파헤치고, 여성의 분노는 되레 이런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핵심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지은이는 자신과 주변의 경험, 수많은 연구 결과와 통계, 사례 등을 폭넓게 동원해 가부장제 사회문화가 여성의 생애 전 주기 동안 거의 모든 방면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여성의 분노를 ‘통제’하고 있는지 고발한다.

여러 연구를 통해 감정 역시 철저하게 ‘젠더화’되어 있으며 가정과 사회가 이를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면에 탑재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은 이미 드러났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남성은 분노를 자연스러운 것, 더 나아가 장려할 만한 것으로 허용받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다. 남성이 남성성이라는 망토의 보호 아래 분노를 거리낌없이 표출하는 동안 여성은 자신보다는 주변의 감정과 필요를 우선시하고 이에 우호적이고 협조적일 것을 일관되게 요구받는다. 젠더 규범이 요구하는 여성성은 분노를 슬픔으로 전환하도록 만든다. “분노는 ‘접근’의 감정인 반면 슬픔은 ‘후퇴’의 감정이다.” 주도적으로 환경을 통제하고 변화시키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환경 속에 머무르고 자신을 반추하는 데에 붙들리는 셈이다. 조금만 분노의 기미를 비쳐도 “히스테리를 부린다”, “같이 일하기 어렵다” 따위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응징’을 당하는 환경 속에서 여성이 화내는 것은 아예 감수할 만한 가치가 없는 모험일 뿐이다.

지난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한 여성이 분노한 표정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 미국의 페미니즘 활동가 소라야 시멀리는 “여성으로서 우리의 분노는 급진적 상상의 행위”라고 말한다. 과달라하라/AFP 연합뉴스
지난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한 여성이 분노한 표정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 미국의 페미니즘 활동가 소라야 시멀리는 “여성으로서 우리의 분노는 급진적 상상의 행위”라고 말한다. 과달라하라/AFP 연합뉴스

지난 8일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날 집회에는 수만명의 여성이 참석해 한 나라에서 하루에 10명 이상의 여성이 살해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과달라하라/EPA 연합뉴스
지난 8일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날 집회에는 수만명의 여성이 참석해 한 나라에서 하루에 10명 이상의 여성이 살해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과달라하라/EPA 연합뉴스

사회가 여성과 분노를 한사코 떼어놓으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은이는 “분노를 개인이나 집단의 자원으로 활용하지 못하게 막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분노가 여성에게 마지막까지 허용되지 않는 감정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그것이 불의에 대항하는 제1방어선이기 때문”이다. 분노를 금지당한 여성은 자기 스스로를 끊임없이 대상화하며 정신적 고통, 무력감, 무능감, 수치심 등에 시달린다. 여성이 스스로에게 무심해지고 자신의 가치와 권리를 스스로 주장할 수 없게 되면, 이 사회는 “재생산, 노동, 섹스, 이데올로기 등 온갖 영역에서 여성을 더욱 쉽게 착취”할 수 있다. 애초 구조적인 차별에 노출된데다 이에 대해 분노하는 것마저 ‘통제’당하는 여성들은,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한편 분노는 더 적게 배출하는 이중적인 괴로움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

지은이가 인용하는 수많은 연구 결과와 사례들은 이 모순적인 현실을 또렷하게 까발리고 있다. 인터넷에서 성적인 내용을 공유하는 ‘섹스팅’ 문제에 대해 한 남자 대학생은 “토스터 사진을 공유하는 거랑 여자친구 벗은 몸을 공유하는 거랑 무슨 차이가 있냐”고 말한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인형을 보살피고 놀도록 길러지는데, 이는 이들에게 한평생 마치 당연한 것처럼 부과될 무급 돌봄노동을 미리 주입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에선 고임금 직업군 30개 중 26개를 남성이, 저임금 직업군 33개 중 23개를 여성이 점유하고 있다. 여성은 성적인 대상 아니면 모성-재생산과 관련이 있어야만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래도 세상이 변하지 않았냐고? 이른바 ‘백래시’는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아이가 없는 밀레니얼 세대 남성 중 35%가 ‘여성이 가정과 아이를 돌봐야 한다’고 믿으며, 이는 엑스(X)세대보다 9%, 45살 이상 남성보다 14% 높은 수치다. 여성이라서 무릅써야 하는 폭력의 현실은 참혹하기만 하다. 여성에게 성적 괴롭힘, 가정폭력, 성폭력, 더 나아가 살해는 일상적인 위협이다. 미국에서 여성이 평생에 걸쳐 성폭행을 당할 확률은 5분의 1(남성은 77분의 1)이다. 그런데 남자 대학생이나 경찰관들은 강간 신고의 절반은 거짓말일 것이라고 믿는다.

지은이는 여성에게 분노는 차별적인 세상을 변화시킬 도구로,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핵심 자원으로 활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흔히 분노는 파괴적인 힘이라서 적절히 통제되어야 한다고 말해지곤 한다. 그러나 여성들은 이미 신물이 날 정도로 자신의 분노를 억누르고 조절해왔다. 이제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분노를 통해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을 찾는 것이다. “분노를 이해하고 위협에 대응해 이를 체계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여성은 수동성, 두려움, 자기 내부로의 침잠에서 깨어 있음, 참여, 변화로 나아갈 수 있다.” 또 분노를 생산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부터 ‘권력에 대한 욕망을 받아들이기’까지 열 가지 기술들도 제안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분노는 가장 여성스러운 덕목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자비롭고도 맹렬하며, 현명하고도 강렬하기 때문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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