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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나는 힘든 사실을 말한다, 사람들이 모르는 게 더 힘들기 때문에

등록 2022-03-11 05:00수정 2022-03-11 09:12

관통당한 몸
크리스티나 램 지음, 강경이 옮김 l 한겨레출판 l 2만2000원

아주 오래전부터 성폭력은 전쟁의 ‘부산물’로 여겨졌다. 아니, 승자에겐 ‘전리품’이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만 봐도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은 전쟁 영웅 아킬레우스에게 트로이를 함락하면 많은 여자들을 주겠노라고 약속한다. 이처럼 전시강간은 무보수로 끌어모은 병사들에게 보상하는 방법이었지만, 사실 이는 ‘보상’의 성격을 넘어선다. “자신의 성기를 공포를 낳는 무기로 쓸 수 있다는 남자의 발견은 최초의 조악한 돌도끼와 불의 사용과 함께 선사시대의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평가될 것”(수잔 브라운 밀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중)이라는 날카로운 지적대로, 강간은 그 자체로 공격이자 무기다.

전세계 분쟁 지역을 누벼온 영국의 여성 언론인 크리스티안 램이 주목한 것도 바로 이 대목이었다. 그는 아르헨티나·시리아·이라크·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나이지리아·르완다·미얀마 등에서 발생한 대규모 집단강간의 ‘생존자’들을 만나며 이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인다. 강간은 가족을 해체하고 미래를 헤쳐갈 내면의 불빛을 꺼뜨리며 때로는 신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생존자들을 더욱 괴롭히는 것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낙인이다. 적의 아이를 임신한 여성은 내쳐지며 태어난 아이는 ‘나쁜 피’로 죄악시된다.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20만~40만명의 여성들이 파키스탄 군인들에게 강간당했다고 여겨지지만, 여성들은 고통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방글라데시 초대 정부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용감한 여성 전쟁영웅’이라는 뜻인 ‘비랑고나’라고 부르며 이들을 예우했지만 이 영예로운 호칭마저도 낙인으로 악용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들 생존자 중엔 희생자로만 남아 있길 거부하고 진실을 증언한 이들이 있었다. 1998년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는 “강간과 성폭력이 그 자체로 표적이 된 특정 집단 전체나 일부를 파괴하려는 구체적 의도로 자행됐다면 다른 행동과 마찬가지로 제노사이드를 구성한다”는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투치족 여성들에 대한 집단강간 사건에 정의를 세우려는 법률가들의 사명감도 한몫했지만, 범죄 사실을 법정에서 증언한 투치족 여성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문맹에 가진 것 하나 없는 여성들이었지만 이들은 살해 위협 속에서도 용기를 내 자신들이 당한 일들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여전히 성범죄 처벌의 기준은 까다롭고 강도가 낮지만 지은이는 독일에서 난민으로 살고 있는 열여섯살 야지디족 소녀의 말을 되새긴다. “말하기도 힘든 일이지만 사람들이 모르고 있기도 더 힘든 일이에요.”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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