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워 소설 읽던 시절이 종종 떠오릅니다. 20대였습니다. 쫓기지 않았던 것도 아니지만 그리 마음이 조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놀고 늦게 귀가한 뒤에 도서관에서 빌린 소설책을 들고 읽어내려가기 시작하면 동이 터올 때까지 한 권을 마치고는 뿌듯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늦여름, 활짝 열린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청량하게 불어 들고, 이야기에 흠뻑 빠져 현실감조차 사라지던 기억.
20년은 족히 지났지만 좋은 책과 매혹적인 이야기를 만나면 여전히 빠져듭니다. 옛날과 다른 점이 있을까요. 쫓기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리 마음이 조급할 것도 없습니다. 도서관에서 대출할 일은 별로 없고, 다음 날을 위해 밤 새우는 일은 되도록 피하려 합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시원하게 바람을 맞이한 일은 별로 없네요. 대신 고요한 시간을 조금 즐기고 싶어한다는 정도.
좋은 책을 만날수록 이 책을 언제 다시 세심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그런 날이 다시 올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좋은 사람을 만난 뒤 곧이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을 앞둔 심경 같다고나 할까요. 몇몇 책을 들추다, 당장 읽어야 할 책을 펼치며, 언제 이 책들을 다시 들춰 살펴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어딘가 한구석이 아려오는 듯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은 희미해질 것이라는 짐작, 종국에는 사라지리라는 운명.
별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를 더욱 충실하게, 너무 열심히는 아니어도 아쉬움은 줄여보려는 몸짓. 안팎으로 광풍이 불고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기막힌 상황이 주어져도, 놓지 말아야 할 것을 가려내는 용기. 이것밖에 없습니다.
김진철 책지성팀장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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