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서방-러시아에 서로 다른 잣대
‘러시아혐오증’ 만들어온 서구
오리엔탈리즘·이슬람포비아와 유사
한쪽만 악마화하는 이분법 위험
서방-러시아에 서로 다른 잣대
‘러시아혐오증’ 만들어온 서구
오리엔탈리즘·이슬람포비아와 유사
한쪽만 악마화하는 이분법 위험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지난 16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데사/AP 연합뉴스
러시아 혐오의 국제정치와 서구의 위선
기 메탕 지음, 김창진·강성희 옮김 l 가을의아침 l 2만7000원 우크라이나 위기의 핵심 쟁점은 우크라이나의 영토와 주권 보전성이다. 2014년 이후 러시아에 합병된 크림반도, 내전이 벌어지는 동부의 돈바스 지역 등 러시아계 주민이 다수인 지역은 우크라이나의 주권이 적용되는 영토로 남아야 한다고 서방은 주장한다. 2차대전 뒤 유럽에서 영토 보전성 원칙은 1975년 체결된 헬싱키조약에서 ‘기존 국경의 불가침성’으로 확인됐다. 당시 소련은 인권 조항을 수용하는 대신에 2차대전 때 진주한 동유럽 지역의 국경선을 공식 인정받았다. 영토 보전성은 불변의 원칙은 아니었고, 문제는 선택적인 적용이었다. 1991년 소련 해체로, 동유럽과 옛 소련 지역의 국경선이 대대적으로 변경됐다. 1990년대 초 유고 연방 해체로 소속 공화국들이 독립했고, 특히 보스니아는 내전으로 사실상 세 지역으로 분할됐다.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슬로바키아도 분리독립했다. 2008년 세르비아로부터 코소보 독립 역시 인정됐다. 이런 분리독립과 국경선 변경은 해당 지역 민족과 주민들의 자결권에 입각한 정당한 주권 획득으로 국제사회가 인정했다. 그러면, 우크라이나 내의 러시아계 주민 지역은 어찌돼야 하나? 1991년 1월21일 우크라이나 당국이 합법적으로 실시한 크림 반도의 주민투표는 80% 이상 투표율에 94%가 크림공화국 복원에 찬성했으나, 크림의 분리는 이뤄지지 않았다. 2013년 말 우크라이나에서 유로마이단 시위로 들어선 친서방 정권이 국민의 20%가 모국어로 사용하는 러시아어의 공용어 지위를 폐지하자, 러시아는 크림을 합병했다. 2014년 3월16일 치러진 주민투표에서 95%가 그 합병을 찬성했다. 미국 등 서방은 이 주민투표는 우크라이나 헌법과 국제법 위반이라며 러시아의 크림 합병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신냉전 질서의 계기라는 2008년 러시아의 조지아 전쟁 역시 조지아 내 소수민족 지역인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분리독립 문제로 촉발됐다. 당시 서방은 일제히 러시아가 조지아에 먼저 무력을 행사하고 주권을 침해했다고 비난했다. 2009년 9월에 나온 유럽연합의 독립적 조사위의 보고서는 전쟁은 남오세티야를 점령하려는 조지아 쪽의 무력 행사로 시작됐음을 밝혔다.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분리독립은 아직 공인되지 않고 있다. 세르비아로부터 코소보 독립 때 서방은 군사개입을 했고, 러시아 역시 크림과 조지아에 군사개입을 했다. 서방의 군사개입은 코소보의 독립과 그 주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위한 것이고, 크림과 조지아에 대한 러시아의 군사개입은 팽창주의 야욕일 뿐인가? 우크라이나와 조지아는 영토보전성을 보장받고, 친러시아인 세르비아는 왜 제외되는가? 스위스 언론인 기 메탕의 <루소포비아>는 서방이 역사적으로 증폭해온 러시아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파헤친다. ‘루소포비아’는 러시아공포증 혹은 러시아혐오증으로 번역된다. 러시아는 밖으로는 팽창주의이고, 안으로는 전제주의여서, 푸틴으로 상징되는 러시아 독재자들의 대외정책은 국제질서를 파괴하고 독재와 억압을 전파한다는 담론은 역사적으로 진화해왔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러시아와 관련된 모든 사안들은 러시아의 책임이라고 서방은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 역사적 뿌리를 중세 때 로마 가톨릭과 콘스탄티노플 동방정교회로의 분리에 이은 반목에서 찾는다.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제국은 여전히 ‘로마’라는 국호를 썼는데, 1557년 독일의 역사학자 히에로니무스 볼프가 ‘비잔틴’이라는 명칭을 붙이고는 ‘전제적이고, 잔인하고, 미개한’ 동방 제국이라고 규정했다. 동로마 계승자를 자처하는 러시아가 17세기 이후 유럽 열강으로 등장하자, 프랑스·독일·영국·미국 등 서방 열강들이 루소포비아를 본격적으로 생산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러시아의 인도양 진출 주문으로 러시아 팽창주의의 교본으로 거론되는 표트르 대제의 유서는 프랑스 외교관들에 의해 허위로 날조됐음이 미국 역사학자 마틴 말리아 등에 의해 규명됐다. 영국은 19세기에 유라시아 대륙 패권을 놓고 러시아와 격돌한 그레이트 게임 때, 러시아의 인도 공격 가능성을 이유로 아프간을 침공했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아프간 전쟁의 기원이다. 당시 러시아는 인도로부터 사막과 산악으로 격리된 2천킬로미터 밖에 있었다. 인도를 공격할 능력과 의도가 현실적으로 없었다. 2차대전 뒤 미국의 냉전 정책의 주축인 대소련 봉쇄의 철학적 근거는 조지 케넌이 주창한 러시아의 역사적 팽창주의였다. 당시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은 조작된 표트르 대제의 유서를 근거로 들기도 했다. 러시아는 중세 몽골 침략 때 유럽의 방파제가 됐고,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패퇴시켜 유럽을 지켰지만, ‘더 나쁜 악당’으로만 치부된다. 기 메탕은 러시아의 정당성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는 “러시아 제국이 캐비어를 팔거나, 상냥하게 굴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전제한다. 다만, 서방의 열강들이나 러시아나 똑같이 제국주의적 팽창을 했고, 그들의 대외정책은 국익에 기반한 선과 악의 모든 요소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유독 미국 등 서방 정책은 자유와 인권에 입각한 선이고, 러시아는 팽창주의와 전제주의를 관철하려는 악이라는 담론으로 채색되어 왔다고 비판한다. 기 메탕은 이 루소포비아가 아시아에 대한 편견과 혐오인 오리엔탈리즘, 반유대주의, 이슬람포비아와 궤를 같이한다고 지적한다. “러시아인을 변명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도 우리와 똑같다는 것을, 더 나쁘지도, 더 낫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고 러시아인의 행동을 상황에 맞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련 봉쇄 정책의 철학적 근거를 제시한 조지 케넌조차도 최근에는 “서구는 푸틴의 정책이 안보라는 명백하고 합리적인 고려로 분명히 설명될 수 있음을 부정한다”며 “서구는 자신들의 지나친 공격성에 대항하려고 한다고 러시아를 벌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우크라이나 위기는 나토를 두고 자신들의 세력권을 확장하려는 미국과 러시아의 국익 충돌에서 나온다. 미국과 러시아 모두에게 선과 악의 측면이 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선이고 악이라는 이분법은 우크라이나와 비슷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우리를 그와 비슷한 운명으로 몰고갈 것임을 직시해야 한다고 <루소포비아>는 지적한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