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곽민지·이진송 지음 l 아말페(2021) 연말부터 새해까지 하루 한 명에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나요? 지난 1년도 고생했어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자꾸 후회로 향했다.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현은 몇 년간 쉬는 날 없이 지내다가 최근 의욕이 떨어진다며, 20대에 자기가 더 노력하지 않았던 게 후회된다고 했다. 15년 넘게 어린이집 교사로 일한 사는 늘지 않는 월급과 경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에 지친다고 했다. 로는 사업이 안정되지 않는 이유가 자기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했다. 시험을 준비하거나 회사에 다니거나 프리랜서이거나 쉬는 중이거나, 각자 처한 상황은 달랐지만 비슷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내가 더 열심히 했다면 지금은 달랐을까.’ 우리의 대화는 후회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나도 그랬다. 주위 대부분의 작가는 ‘엔(n)잡’을 소화하면서 글을 쓴다. 전업 작가로 생활하는 나는 비교적 쓸 시간이 많지만, 최근에는 쓰기는커녕 한 문장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안 쓰고 후회하고 안 쓰고 자책하는 상태가 지속되니까 지난 1년이 ‘리셋’되고 새롭게 시작되는 새해의 마법도 통하지 않았다. 연말에 이 책이 도착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후회의 늪에서 허우적거렸을 거다. 곽민지·이진송 작가가 쓰고 만든 에세이 <미루리 미루리라>는 내 안의 강박·불안·게으름을 유머로 태워버린다. 두 사람은 글을 쓰고 팟캐스트를 진행하며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다. 대단한 일을 동시에 해내는 멋쟁이들이 얼마나 진심으로 일을 미루고, 미루는 자기를 미워했는지 읽다보면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군요. 근데 이렇게 멋진 책을 내다니, 더 멋있어.’ 두 사람이 서로의 모습을 보며 느꼈다는 연대감을 나도 느꼈다. 연대는 나아갈 힘과 같은 말일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책의 빈 칸에 열심히 필기를 했다. 내가 미룬 일, 미루지 않은 일, 미뤄도 되는 일, 안 되는 일을 적었다. ‘나는 게을러’라는 큰 문장을 잘게 쪼개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모든 걸 미루는 답 없는 상태라고 믿었는데, 매일 아침 반려식물에게 물주기, 가사 노동, 반려동물을 챙기는 건 미루지 않았다. 당장은 원고가 밀려 보여도 쓰기 위해 고민하고 숙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곧 쓸 거라고 말하는 대신,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투명하게 공유할 필요도 느꼈다. 새해에도 나는 아마 계획한 일을 미룰 거다. 나를 다그칠 때마다 진송 작가의 말을 기억할 거다. “게을러서 미루는 것뿐 아니라, 사실 나는 해낼 힘이 떨어진 게 아닐까? 내가 지금 나와 같은 조건의 타인이 내 앞에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대할까? (…) 최선을 다한다는 건 너무나 멋진 일이지만, 우리는 매 순간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쥐어짜며 살 순 없거든요.” 어쩔 수 없이 내가 미워질 때는 민지 작가의 문장을 기억할 거다. “미루미들은 미룰지언정 포기하지 않기에 관두미가 아닌 미루미이고, 피로를 감수하고 노동을 미루면서도 눈앞에 있는 사랑하는 것들을 챙기거나 순간의 기쁨을 스스로에게 선사한 후 그 결과를 잔업으로 책임지는 사랑꾼들입니다.” 빽빽한 새해 계획에 벌써 지쳤다면, 앞으로 지칠 게 예상된다면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한바탕 웃고 나면, 어떻게든 지금을 살 수 있을 거예요. 이 책만은 미루지 말고 미리 꺼내 읽어요. 홍승은 집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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