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상놈 하나 때려죽이는 일

등록 2022-02-11 04:59수정 2022-02-11 10:43

[한겨레Book] 강명관의 고금유사
고흥손은 경기감영의 기수(旗手)였다. 1822년 봄 그는 적한(賊漢), 곧 도둑으로 몰려 체포되었다. 포교 이광재와 포졸 유금손은 고흥손을 체포한 뒤 몇 달을 포도청에 가두어 놓고, 쇠꼬챙이를 달구어 살을 지지고 팔다리의 일부를 자르는 등 갖가지 악형(惡刑)으로 자백을 하라고 닦달했지만, 고흥손의 입에서는 범죄와 관련된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건질 것이 없게 된 이광재와 유금손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 고흥손에게 ‘잠도’(潛屠, 소의 밀도살)를 범했다는 죄목을 씌워 형조로 회부했다. 형조의 재조사 과정에서 이광재와 유금손이 양민에게 누명을 씌워 고문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광재·유금손은 매를 맞고 귀양을 갔다. 고흥손은 석방되었다. 물론 그 어떤 보상도 없었다!

고문을 한 것은 그리 큰 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듬해 봄 귀양지에서 돌아온 유금손은 길에서 고흥손을 만났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고문기술자 유금손은 자신이 ‘억울하게’ 귀양을 갔다고 생각했다. 고흥손이 고와보일 리 없었다. 둘은 시비가 붙었다. 유금손의 힘을 감당할 수 없었던 고흥손은 칼을 뽑아 방어하다가 유금손의 팔을 찌르게 되었다. 유금손은 포도청에 고소했다. 포도청에서는 즉시 고흥손을 잡아다가 곤장을 호되게 쳐서 죽여 버렸다. 원래 곤장을 30대 친 뒤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려 다시 쳐야 하는데, 연속하여 30대를 더 쳤던 것이다. 포도청은 자기 식구인 유금손의 편을 들어 고흥손이 포도청 문을 넘어서는 순간 죽여 버리기로 작정을 했던 것이다.

고흥손을 도둑으로 몰아 고문한 유금손의 전력을 알고 있었던 형조가 이 사건을 그냥 둘 리 없었다. 조사를 위해 유금손을 체포하려고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금손은 포도대장 집 행랑채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유금손을 잡아 보내라는 형조의 이어지는 채근에도 포도청 역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보내지 않았다. 포도청은 형조에 소속된 예하 관서, 곧 속사(屬司)였다(요즘으로 치면 형조는 법무부, 포도청은 경찰과 검찰을 합친 곳이다). 그런데 포도청은 형조를 무시하고 독립기관인 것처럼 굴었다. 심지어 형조에서 직접 종사관을 보내 명령을 전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피해자 고흥손의 가족은 너무 억울했다. 형 고성손이 형조에 고발장을 제출했고, 형조는 이 고발장을 명분으로 삼아 왕(순조)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였다. 형조의 논리는 또렷했다. 고흥손이 칼을 뽑아 유금손을 다치게 했다면, 형조로 이관하여 법에 따라 처벌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포졸의 말을 듣고 고의적으로 고흥손을 장살(杖殺)한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형조에서는 고흥손을 죽이는 데 연루된 포교와 유금손을 형조로 이관하여 법에 따라 처벌하고, 당시 고흥손을 장살한 포도대장을 의금부에 잡아다 처벌할 것을 요청했다. 순조는 그대로 따랐다.

형조는 당시 포도청이란 기관의 성격을 이렇게 정리했다. “대저 포도청을 설치한 것은 곧 백성을 위해 도둑을 잡으라는 것인데, 도리어 악행을 저지르고 법을 무시하는 데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사실이 그랬다. 유금손을 내놓으라는 형조의 요구에 포도대장이 이런 말로 거절했으니 말이다. “포도청에서 상놈 하나 때려죽이는 것은 예사로 있는 일이다.” 사족. 200년이 지난 지금 이 말이 낯설게 들리지 않으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나만 그런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