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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어른이 된다는 것은 유능한 ‘게이머’가 되는 것

등록 2006-02-16 18:05수정 2006-02-17 16:52

<호밀밭의 파수꾼>(1951)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16살 홀든 콜필드가 크리스마스방학을 앞둔 어느날 밤 학교 기숙사를 떠나 뉴욕에서 혼자 방황하는 보낸 2박3일 간의 쓸쓸한 일탈기이자 청소년의 정신적 방황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홀든이 며칠간 들여다 본 세계는 거짓과 위선, 불의와 폭력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림은 이 소설의 배경이 된 뉴욕 거리의 최근 스케치로, 프랑스 화가 장 자끄 상뻬가 그렸다. <뉴욕 스케치>(열린책들)에서
<호밀밭의 파수꾼>(1951)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16살 홀든 콜필드가 크리스마스방학을 앞둔 어느날 밤 학교 기숙사를 떠나 뉴욕에서 혼자 방황하는 보낸 2박3일 간의 쓸쓸한 일탈기이자 청소년의 정신적 방황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홀든이 며칠간 들여다 본 세계는 거짓과 위선, 불의와 폭력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림은 이 소설의 배경이 된 뉴욕 거리의 최근 스케치로, 프랑스 화가 장 자끄 상뻬가 그렸다. <뉴욕 스케치>(열린책들)에서
16살 소년 정신적 방황 그린 성장소설
학교·집 벗어나 뉴욕에서 2박3일간 일탈
거짓·위선·불의로 가득 찬 세계 목격
성장은 선한 본성 잃고 게임의 법칙에 휘둘리는 것
한때 소년이었던 어른은 다 잊었는가, 순수를

고전 다시읽기/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세상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 흐르는 세월은 우리에게 변하는 것의 신비로움과 변하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알려준다. 돌이켜보면 사람은 누구나 아이에서 자라나 어른이 되지만, 이상하게도 어른이 되어서 아이적의 순순함을 그대로 간직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성장’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이들이 자라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한 때 아이였지만 지금은 어른이 된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성장’의 의미를 물어본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청소년기, 혹은 사춘기란 뜻의 ‘adolescence’는 ‘어른으로 자라다’(adolescere)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하지만 어린이를 단지 ‘작은 어른’이 아닌 하나의 고유한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혁명과 함께였다. 근대적 혁명정신의 총아였던 루소는 어린이야말로 인간본성의 자연 상태, 즉 자유롭고 평등하며 공감과 연민을 간직한 ‘선’(善)의 상태를 구현한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인간본성인 ‘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문명화된 교육이 아닌 자연 속에서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루소는 <에밀>에서 청소년기야말로 ‘제2의 탄생기’이며 우정, 동정과 같은 도덕적, 종교적 감정교육의 시기이자 성의식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라고 보았다. 아마도 시인 워즈워스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한 까닭도 어른들은 잃어버린 천부적으로 선한 사람의 본성이 아이들에게는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51년 처음 출판된 <호밀밭의 파수꾼>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에서만 해마다 30만부 이상이 팔리는 인기작품이다. 샐린저는 이 한 권으로 일약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겪었던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결핍을 신랄하게 파헤친 비판적 선구자가 되었다. 이 작품은 루소가 말한 ‘제2의 탄생기’에 접어든 홀든 콜필드라는 16살 소년의 정신적 방황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뉴욕의 부유한 가정출신인 홀든은 5과목 가운데 4과목에 낙제하고, 학교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해 결국 펜시 프렙 보딩스쿨마저도 떠나게 된다. 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한 홀든은 크리스마스방학을 앞둔 어느 토요일 밤 펜실베니아의 학교 기숙사를 떠나 뉴욕에서 혼자 며칠간을 보낸다. 학교는 나왔으나 집으로 돌아 갈 수는 없어 방황하는 한 소년의 2박3일 간의 쓸쓸한 일탈기가 이 소설의 전체 줄거리이다.

게임은 약자에게 공정할까

사춘기에 접어든 홀든에게는 학교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 모두가 바보천치들의 세계였다. 우정을 배워야 할 기숙사는 친구들끼리 겁주고 싸움하는 장소였고, 부모로부터 사랑과 평화를 느껴야할 집은 숨어들어가거나 도망쳐야 할 장소였다. 게다가 루소가 말한 청소년기 교육의 중요한 부분인 역사는 그에게 게임의 법칙을 가르치는 교과목에 불과했다. 학교를 떠나는 날 찾아간 역사교사인 스펜서 선생은 홀든에게 인생은 규칙에 따라 경기를 벌이는 게임이라고 조언해준다. 게임이란 결국 남과의 경쟁을 통해 우열과 승패를 가리는 것이다. 정말로 역사가 게임이라면 처음부터 보잘 것 없는 쪽에 선 경우에도 게임이 될 것인가, 규칙은 약자들에게도 공정하게 적용될 것인가, 게임에서 진 약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홀든은 그런 세상의 법칙에 의문을 던진다.

또한 성의식에 눈을 뜬 홀든은 룸메이트인 스트레드레이터의 데이트 상대가 자기가 좋아했던 제인이었음을 알고 절망한다. 왜냐하면 그 룸메이트는 첫 데이트에서부터 섹스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제인과의 순수한 추억을 간직한 홀든과 그저 하룻밤 데이트였던 스트레드레이터간의 시비는 결국 싸움으로 번지고, 격투에서 진 홀든은 모두가 잠들자 조용히 짐을 꾸려 학교를 떠난다. 하지만 게임의 규칙이 엉망이긴 뉴욕거리도 마찬가지였다. 뉴욕에서 처음 만난 에드몬드 호텔의 엘리베이터 직원은 홀든에게 5달러에 창녀를 소개해주지만 다음날 아침이 되자 가격은 10달러로 치솟아 있었다. 공정함을 요구하던 홀든에게 돌아온 것은 또 다시 폭력이었다.

학교에서부터 뉴욕에 이르기까지 홀든이 며칠간 들여다 본 세계는 거짓과 위선, 불의와 폭력이 가득한 곳이었다. 엄격하고 무관심한 아버지와 날카롭고 예민한 어머니, 돈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할리우드에 파는 형, 부모의 옷차림으로 사람을 대하는 학교장, 유일하게 믿고 의탁했으나 결국 성추행을 하는 앤톨리니 선생 등, 그곳은 다른 존재의 상처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세계였다. 마치 센트럴파크 연못에 살던 오리들이 날씨가 추워지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또 마치 아이들이 호밀밭에서 정신없이 놀다가 혹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을까 아무도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하는 여동생 피비를 보기 위해 숨어들어간 집에서 홀든은 여동생에게 자신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아무도 없으니 자신이라도 절벽 가에 서서 아이들이 놀다가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절벽으로 떨어지려는 홀든을 잡아주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 지켜주겠다고 한 10살된 여동생 피비였다. 집을 버리고 몰래 서부로 떠나려는 홀든과, 가방을 들고 나서며 무조건 오빠를 따라가겠다는 피비, 결국 홀든은 가출을 포기하고 여동생을 동물원에 데려가게 된다. 회전목마를 타며 웃는 동생과 내리는 비속에서 그런 여동생을 바라보는 오빠 홀든, 그 순간 서로가 서로에게 느꼈던 공감과 연민만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려는 홀든을 잡아줄 수 있었다. 결국 홀든은 가출을 포기하게 되고 집으로 돌아와 정신치료를 받는다.

속물적 세계에 맞설 힘 ‘순수’

청소년기란 아이에서 어른으로 눈떠가는 과정이다. 홀든이 여동생을 기다리며 본 초등학교 담벼락의 욕과 낙서들처럼 이 세상엔 인간 본성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위협하는 거짓들이 가득하다. 홀든이 경험한 어른의 세계란 물질주의적이며, 비인간적이고, 공허한 속물들의 세계일뿐이었다. 아이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원래 있었던 이런 천부적인 선한 본성은 점차 잃고, 세상의 게임법칙에는 더욱 유능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장’이 고작 그런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하는데 어떻게 저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른이 되면 저항했던 모든 소년들은 사라지고 현실세계에는 유능한 게이머들만 가득하게 된다. 우리 모두도 한때 순수한 세계에서 시작했건만 왜 어른이 되면 다 잊어버리는 것일까? 워즈워스는 설령 그 세계가 세월이 흐르면 사라져버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세월 속에 남아 있던 광채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선한 사람의 본성을 잠시나마 간직했던 어린시절은 이런 속물적인 세상에 맞설 힘을 주기 때문이다. 워즈워스는 저항과 공감은 결국 순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박혜영/인하대 교수·영문학
박혜영/인하대 교수·영문학

“한때 그처럼 찬란했던 광채가

이제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졌다한들 어떠랴,

초원의 빛, 꽃의 영광, 그 시간들을

다시 불러올 수 없다한들 어떠랴,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라,

지금까지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본원적인 공감에서,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솟아나

마음을 달래주는 생각에서,

죽음 너머를 보는 신앙심에서,

그리고 지혜로운 정신을 가져다주는 세월에서.”

서평자 추천 도서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1998)

(원문을 잘 살린 번역서)

호밀밭의 파수꾼

공경희 옮김

민음사 펴냄(2001)

(출판 50주년을 맞아 나온 공들인 번역서)

J. D. 셀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김성곤 지음

살림 펴냄(2005)

(작가와 작품에 대한 풍부한 해설이 담겨 있는 영문학자의 저서)

50자 서평

◇ 아프락사스(인터넷서점 알라딘 마이리뷰에서) “홀든에게서 난 과거의 나를 느꼈고, 사회와 조금 타협한 지금의 내 안에 잠재해 있는 반항아를 본다. 이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홀든이 잠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 비연(〃) “동서양을 막론하고 젊음의 방황이라는 주제는,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 말짜(〃) “그는 아직 완전한 어른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설픈 세태비평으로 반항만을 일삼던 청년 또한 아니다. …그 시절 그가 했던 생각과 행동을 잊지 않는다면 좀 더 그럴듯한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심경보(〃) “반세기도 훨씬 전의 17세 소년에 공감하고 있는 서른일곱의 아저씨라니! 다 늦은 나이지만 저도 (홀든) 콜필드처럼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었으면 합니다.”

▽ 다음주 이후 고전 <과학혁명의 구조>, <금오신화>, <파시즘의 대중심리>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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