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와 나
제이 파리니 지음, 김유경 옮김 l 책봇에디스코 l 1만8000원
“보르헤스가 여기에 있어요. (…) 앞이 보이지 않고, 말을 엄청 많이 해요.”
71살 보르헤스와 여행한 20대 청년의 말이다. 보르헤스를 읽어본 적도 없던 이 청년은 훗날 영문학 교수이자 작가가 된다. 그리고 70대가 되어, 보르헤스와 스코틀랜드를 여행한 일주일을 회상하며 그의 회고록을 펴낸다. 제이 파리니의 <보르헤스와 나>가 그것이다.
여느 회고록과 다르다. 이 책은 이야기가 뼈대인 ‘소설 형식의 회고록’이다. ‘진지한 농담’의 대가 보르헤스 회고록답게 위대함과 가벼움이 어우러지는 내러티브가 유창하다.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 않다.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헐렁한 갈색 세로줄무늬 양복, 오렌지빛 폭포수와 날아가는 물고기 무늬에 식사 때 먹은 음식물 흔적까지 가득한 넥타이를 맨 보르헤스의 대답은? “더 크게 말해, 난 맹인이란 말일세!”
여행 당시 보르헤스(가운데) © JAY PARINI
보르헤스와 같이 여행하던 당시의 제이 파리니. © JAY PARINI
자신감만큼 수다도 특급이었다.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을 대표하는 이 ‘인간 백과사전’은 방대한 인용을 통해 청년에게 끊임없이 말한다.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랑과 시를.
앞이 보이지 않는 보르헤스는 파리니에게 “본 것을 정확하게 묘사”해달라고 부탁한다. 북해를 지날 때 파리니가 하는 말. “파도가 치고요.” (음…) 이어지는 “잔소리”는 쉽고 탁월한 작문법이다. “그건 충분히 구체적이지 못해. 내달리는 파도에 관해서 이야기해봐. 물 위에서 달리는 그 하얀 말들에 대해서 말일세. ‘어둡다’는 건 세부적이지가 못해. 그 색깔은 어떤가? 비유를, 이미지를 찾아. 나는 자네가 보는 것을 보고 싶네.”
카네기 도서관을 방문한 두 사람. 청년은 다시 묘사한다. “창문이 마치 눈을 굳게 감고 있는 것처럼 화가 나 보이는 건물이네요. 지붕선은 휘어진 눈썹 같고요. 뭔가 불만스러워 보여요.” (음~)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1911년도 판을 만난 보르헤스는 갑자기 “고양이”가 되기도 한다. 책등을 핥기(!) 시작했다. “선생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경악한 도서관 직원) “가장 훌륭한 판본이지! (…) 어떤 책들은 맛을 봐야 하거든. 나는 책을 시식하는 걸 좋아해.”
실화가 바탕이라지만 363쪽(한국어판 기준) 분량의 50년 전 대화가 너무 구체적이란 점은 사실성에 대한 의구심을 자극할 수도 있겠다. (보르헤스의 생존해 있는 아내 마리아 코다마는 이 책에 노여움을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르헤스도 말하지 않았는가. “사실 기억을 거친 모든 것은 허구가 된다네.”
석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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