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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연구자? 함께 나누는 학자!

등록 2022-01-07 05:00수정 2022-01-07 16:28

한국 사회학사 조망한 ‘사회학자/작가’ 정수복
11명 학자 중심으로 세 갈래 학문 경향 분석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학문” 하지 않으려면…

한국 사회학의 지성사 1: 한국 사회학과 세계 사회학
한국 사회학의 지성사 2: 아카데믹 사회학의 계보학
한국 사회학의 지성사 3: 비판사회학의 계보학
한국 사회학의 지성사 4: 역사사회학의 계보학정수복 지음 l 푸른역사 l 12만2500원(세트)

‘A4 10장짜리 논문 공장’이라는 자조적인 말이 보여주듯 위기에 빠진 우리 학문은 아직 획기적인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성’을 경험하고 있는 한국 사회로부터 보편적인 것의 특수성, 특수한 것의 보편성을 이끌어내려 하는 고유한 이론이 부족하다는 것이 핵심 문제로 꼽힌다.

어느 기관에도 속하지 않은 채 독립적인 ‘사회학자·작가’라는 정체성을 지켜 온 정수복(67)은 2022년 벽두에 네 권으로 이뤄진 <한국 사회학의 지성사> 시리즈를 펴내며 이 문제를 정면으로, 또 이전에 없던 방식으로 다루겠다고 천명했다. “네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것”이라는 말처럼, 한국 사회학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데에서부터 미래의 사회학이 어때야 하는지 길을 찾아보자는 제안이다.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지은이는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며 “종합”이란 말을 자주 썼다. 이제껏 한국 사회학의 역사를 서술하려는 ‘사회학사’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연구 주제나 분과, 학자 개인에 대한 연구 등 부분적인 것들을 다루는 데 그쳤을 뿐 전체를 종합적으로 꿰어내진 못했다는 지적이다. 지은이는 세계 사회학의 흐름 안에서 한국 사회학의 역사를 파악하려 시도했다는 점,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학자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연구를 했는지를 중심으로 접근했다는 점, ‘학술장’의 개념으로 학문적 흐름을 파악하고 그 관계를 분석했다는 점 등을 이 작업의 의미로 내세웠다. “서울대 출신, 미국 유학파, 일류대학 소속” 등의 주류적 흐름과는 “적정한 거리”가 있는 자신의 ‘이방인’ 정체성(비서울대 출신, 프랑스 유학파, 독립적인 사회학자·작가)도 이런 작업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짚었다.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스튜디오에 선 사회학자·작가 정수복(67). 대학 등 제도권 바깥에서 연구 활동 이어온 그는 10년 동안 매달려 온 &lt;한국 사회학의 지성사&gt;(푸른역사) 끝낸 직후지만, 서구 근대 학문이 우리나라 근현대에 정착하는 역사를 다루는 한국 근현대 학문의 지성사, 자신의 지적 자서전, 임상사회학 저서, 동서양·한국 지식인의 역사 등 20년을 내다보는 앞으로의 집필 계획도 밝혔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스튜디오에 선 사회학자·작가 정수복(67). 대학 등 제도권 바깥에서 연구 활동 이어온 그는 10년 동안 매달려 온 <한국 사회학의 지성사>(푸른역사) 끝낸 직후지만, 서구 근대 학문이 우리나라 근현대에 정착하는 역사를 다루는 한국 근현대 학문의 지성사, 자신의 지적 자서전, 임상사회학 저서, 동서양·한국 지식인의 역사 등 20년을 내다보는 앞으로의 집필 계획도 밝혔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시리즈의 전체 구조는 이렇다. 1권 <한국 사회학과 세계 사회학>은 세계 사회학의 역사와 지형도를 그려보고, 그 자장 안에서 한국 사회학이 어떤 100년을 밟아왔는지 통사를 서술하고 주된 계보들을 제시한다. “사회학의 기초가 된 ‘사회사상’의 뿌리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18~19세기 유럽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사회학’이란 학문은 20세기 들어 미국에서 체계화되었다.” 애초 사회개혁운동으로부터 출발한 미국 사회학에선 점차 과학적인 ‘전문성’을 추구하는 과학주의 사회학이 주류로 자리잡았고 이 흐름이 2차대전 뒤 전지구적으로 영향을 끼쳤는데, 나름의 지적 전통이 있던 영국, 프랑스, 독일 사회학은 미국 사회학의 영향력을 극복하고 나름의 사회학 전통을 만들 수 있었다. 이른바 ‘주변부’ 세계에서도 학문적 전통의 존재와 계승 여부 등 여러 요소들에 따라 그저 미국 사회학의 영향 아래 머무느냐, 나름의 사회학을 발전시키느냐가 갈렸다. 라틴아메리카의 ‘종속이론’, 인도의 ‘서벌턴 연구’ 등은 ‘주체적’인 사회학 흐름을 만든 사례로 꼽힌다.

한국 사회학 역시 1906년 일본을 통해 이인직이 최초로 도입했으나, 본격적인 제도화는 2차대전 직후 미 군정기에 이뤄졌다. 지적 자원이나 학문 전통 등이 부족했던 한국 사회학은 출발부터 미국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그 결과 1970~80년대 들어서야 나름의 사회학을 추구하는 흐름이 본격화했다는 게 지은이의 관점이다. 지은이는 크게 세 가지 계보를 제시한다. 미국 엘리트 대학 유학을 통해 한국 사회학계의 주류로 정착한 과학주의 사회학은 ‘아카데믹 사회학’이라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우리다운 사회학을 하자는 비판이 두 갈래 흐름을 낳았다. 한국적 현실을 천착하여 사회를 개혁하는 지식을 생산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비판사회학’이 그 하나라면, 현실 참여를 자제하고 한국의 고유한 역사적 맥락을 강조한 ‘역사사회학’이 또 다른 하나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상백, 배용광, 이만갑, 이해영, 김경동(이상 아카데믹 사회학), 이효재, 한완상, 김진균(이상 비판사회학), 최재석, 신용하, 박영신(이상 역사사회학) 등 학자 11명 개인의 삶과 저작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2~4권에 이 세 갈래 흐름을 나눠 담았다. 세 갈래 흐름은 사회학계에서 암암리에 인식되곤 했으나, 이처럼 “뚜렷하게 구별하여 대표 학자들까지 넣어둔 것은 처음”이라고 지은이는 말했다.

이처럼 한국 사회학은 미국 사회학의 영향에 대해 주체적 학문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긴장 관계 아래에서 전개되어 왔지만, 그 어느 한쪽을 배제하거나 배격할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종합’을 말하는 지은이의 강조점이다. 한국 사회학의 과제는 “아카데믹 사회학을 통해 학문적 분석 능력을 높이고 역사사회학을 통해 현재 우리 사회의 역사적 경과에 대한 분석을 심화시키면서 비판사회학의 입장에서 더욱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 개인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기여하는 것이다.” 물론 한국 사회 고유의 이론을 만드는 것은 “미완의 여정에 그치고” 있지만, 그러나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11명의 학자들이 보여줬듯 주류든 비주류든 “한국 사회학은 나름대로 노력을 해왔다”고 지은이는 평가한다. 필요한 것은 “다리를 놓아서 교류하도록, 그래서 서로를 풍부하게 해주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 주류 사회학을 공부한 이효재가 한국 현실을 대면하면서 학문 세계의 ‘전환’을 이뤘듯, 다양한 요소가 종합될 때 비로소 미국·유럽을 ‘지방화’(provincialize)하고 고유한 학문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란 지적이다.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스튜디오에 선 사회학자·작가 정수복(67).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스튜디오에 선 사회학자·작가 정수복(67).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무엇보다 지은이는 냉전 이후 2000년대 들어 세계적인 차원에서 다시 강화되고 있는 “보편성을 앞세워 전문화를 강조하는 흐름”을 크게 우려했다. “우리 현실보다는 미국과 유럽의 유명 저널들만 보면서, ‘경박단소’(輕薄短小)한 차원의 파편적인 논문들만 양산되고 있어요. 전체를 보면서 부분을 보고, 부분을 보면서 전체를 보려 하는 ‘중후장대’(重厚長大)한 관점이 절실합니다.” 이는 사회학뿐 아니라 전체 학문에도 해당되는 위기다. 그는 저작이 아닌 논문을 요구하는 등 학자로서의 열정과 지성을 평가하지 않고 기술적인 평가만 하는 체제, 학계 내 소통과 교류의 부재, 고유한 이론의 부재 등을 “물거품 같은 학문만 하게 만드는” 세 가지 핵심 문제로 꼽았다. “우리나라 대학 등에서는 학술 저작을 ‘논문 2편’으로 평가하는데, 그런 논리라면 이번 4권짜리 제 책은 ‘논문 8편짜리’에 불과합니다. 이래서야 누가 ‘중후장대’한 학문을 하려 하겠습니까.” 학계뿐 아니라 출판계에도 해당하는 얘기다. 지은이는 이번 시리즈의 출간을 위해 학술 저작을 펴낸다고 하는 대형 출판사 예닐곱 곳의 문을 두드렸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한마디로 돈벌이가 안 된다는 것. 한국사회학회와 포스텍 융합문명연구원의 출판 지원에 힘입어 겨우 출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근본적으로 사회학은 다른 학문들과 대화하고 수용하고 공급해주는, 종합적인 걸 할 수 있는 학문입니다. 사회학자만 알기엔 너무 아까운 학문이죠.” 사회학의 이런 성격을 되새기며, 지은이는 자신의 작업에 자극을 받아 “다른 학문에서도 우리 학문의 족보·이정표를 만드는 작업이 나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책에서는 이를 “상호 참조와 집합적 열정 만들기”라고 불렀다. ‘전문성’이란 이름 아래 자기 작업에만 매몰되는 ‘연구자’가 아니라, 서로를 참조하고 종합하며 ‘집합적 열정’을 불사르는 ‘학자’가 되자는 얘기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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