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편집 외길 30년 “한번은 읽을 만한 책, 만들어 왔죠”

등록 2021-12-31 05:00수정 2022-01-03 13:07

편집자는 책 만드는 전 과정 조율하는 ‘총연출자’
30년 동안 초교 보는 일 놓은 적 없어
한국 사회 문제 해결에 일조할 책 내고 싶어
최연희 도서출판 따비 기획편집위원이 지난 15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스튜디오에서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 위원이 들고 있는 ‘벽돌책’은 자신이 편집한 <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최연희 도서출판 따비 기획편집위원이 지난 15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스튜디오에서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 위원이 들고 있는 ‘벽돌책’은 자신이 편집한 <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제게 이렇다 할 편집자론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현업에서 쭉 해온 실무를 한번 보고하는 차원에서 얘기해봐라, 이런 뜻으로 알겠습니다.” 

최연희(60) 도서출판 따비 기획편집위원은 인터뷰 요청에 조금은 주저하며 말했다. 최 위원은 1992년 한울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기 시작해 지난 6월 교유서가 출판사에서 정년퇴직을 했다. 지난 11월에는 제4회 롯데출판문화대상 출판외길 부문 공로상을 수상했다. 출판사 대표 등이 아닌 일선 편집자가 해당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지난 15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최 위원을 만나 ‘편집자’, 그리고 ‘책을 만드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출판계 동료, 심사위원 들께서 제가 편집자로서 교정교열 등 실무를 끝까지 놓지 않고 정년퇴직한 것을 좋게 봐주신 것이 아닌가, 편집자들의 애환을 감안해주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편집자는 출판계 바깥에서는 여전히 낯선 직업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도 저자, 번역가, 출판사 등을 넘어 편집자에까지 관심이 미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편집자는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고 조율하는 중심적인 존재다. 원고를 받아 문장을 다듬고 교열을 보고 제목을 단다. 디자이너와 상의해 책 표지와 본문의 디자인을 정하고 마케팅 부서와 협의해 홍보 방향을 잡는다. 어떤 책을 낼지 고민하고 이에 맞는 저자를 발굴해 섭외하는 기획 업무도 편집자의 주요한 역할로 자리잡고 있다. “책의 총연출자죠. 텍스트를 가장 먼저 보고, 가장 많이 고민하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편집자는 “표 안 날 일을 티 안 내고 해야 하는 그런 직종”이기도 하다. “젊었을 때는 ‘내가 이렇게 공을 들였는데, (책이 시장에서) 좀 나가줘야 하는데,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하는 보상심리가 제법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질없지요. 하지만 나니까 이 일을 해냈어, 편집자한테는 이런 일말의 선민의식도 좀 필요하다고 봅니다. 내 세계관, 가치관에 입각해서 ‘이 책을 한국 사회에 소개해보고 싶어, 나라도 소개해야 돼’ 하는 소명의식, 목적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가 한국 사회에 펴내고 싶은 책은 이런 책들이다. “비판적 상상력을 촉발하는 책, 해당 분야의 첨단을 달리는 메시지를 담은 책, 전문가와 일반인이 함께 찾을 수 있는 책, 앞으로 최소 50년은 계속 인쇄될 책.” 그리고 현실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는 책. “내가 지금 발 딛고 사는 사회,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 데 일조하는 책, 그런 책을 한 권이라도 더 내자, 아직 저는 그렇습니다.”

그동안 편집·기획한 책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을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최 위원은 40여권을 정리해 가져왔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장 지글러)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교역으로 읽는 세계사 산책>(케네스 포메란츠·스티븐 토픽) <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제프 일리) <불안한 승리: 자본주의의 세계사 1860~1914>(도널드 서순)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강상중·현무암) <엥겔스 평전>(트리스트럼 헌트) <문명과 전쟁>(아자 가트)…. 대부분 진중한 인문·사회과학 분야 교양서들이다. 500~600쪽을 훌쩍 넘는 ‘벽돌책’도 상당수 눈에 띈다. “언젠가부터 길게 돌아보고 내다보는 역사서, 문명사, 이런 쪽에 조금 더 관심이 가더라고요.”

80학번인 최 위원은 대학 입학 뒤 민주화운동을 하다 강제징집을 당했다. 복학한 뒤에도 여러 민주화운동 단체에서 활동했다. 민청련의 <민중신문>, 백산서당의 <월간 노동자> 같은 매체에서 일하다 지인의 소개로 한울출판사에 입사했다. 한울을 시작으로 심산, 뿌리와이파리, 책과함께, 글항아리, 교유서가 등의 출판사를 거쳤다. 외국에 견줘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경영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국내 출판계에서는 편집자들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다. 많은 편집자가 40대 중후반 정도에는 독립해 자신의 출판사를 세우거나 다른 업계로 이직한다. 편집자로 남은 최 위원의 이력이 두드러져 보이는 이유다.

그는 편집장, 편집주간, 주간, 기획실장 등 여러 직함을 달고 일했지만, 그의 정체성은 늘 관리자보다는 일선 편집자였다. “30년 동안 초교(첫 교정교열. 일반적으로 편집자가 초교, 재교 등 여러 차례의 교정교열을 마치면 편집장 등이 최종 점검을 한다) 보는 것을 놓은 적은 없습니다. 관리만 하는 것은 저하고는 잘 안 맞더라고요. 기획하고 교정교열 보고 저자·역자 만나러 다니고 바닥에서 일하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본인의 의지가 있다고 해도 회사 쪽에서는 연차가 높은 인력을 꺼리지 않을까? “실무를 뛰어서 나름의 성과를 내면 괜찮지 않을까요? 경영진 입장에서도 (이 사람이) 회사 브랜드를 살리면서 이문도 어느 정도 남긴다면, 또 회사에서 모나게 굴지 않는다면, 이런 몇 박자만 맞아준다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관건은 ‘실력’ 아니겠냐는 자신감이 읽힌다.

편집자로서 ‘롱런’한 데는 그의 기획 능력이 한몫하고 있다. 최 위원은 외국 서적 가운데 국내에 소개할 만한 책을 발굴해내는 눈이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를 위해 외국 주요 출판사들의 소식지와 누리집, 아마존 같은 외국 서점 사이트, 일간지 등을 들여다보며 어떤 책이 새로 나왔는지, 조만간 나올 책은 무엇인지를 검색한다. 끊임없이 책을 찾아다니다 보면 꿈에서까지 나타난다. “이 제목은 메모해야 하는데 하면서, 메모를 못 해 안타까워하다가 잠을 깬 적도 있죠.” 그가 다이어리를 펼쳐서 보여준다. 하루에 한두 권씩 꼬박꼬박 기획 후보 책들이 적혀 있다. “한국 사회에 당장 펴낼 만한 책들을 말해보라고 하면 10종은 바로 고를 수 있어요.”

최연희 위원의 ‘기획노트’. 자신이 검색해 찾은 한국에 소개할 만한 외국 서적 후보들을 날마다 적어놓았다. 최연희 제공
최연희 위원의 ‘기획노트’. 자신이 검색해 찾은 한국에 소개할 만한 외국 서적 후보들을 날마다 적어놓았다. 최연희 제공

인터넷에 밀려 출판 시장이 점점 위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내야 할 책’과 ‘팔릴 책’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잡아야 할까? “최대한 심사숙고해야겠죠. 하지만 주제 변별력 있고, 원고 완성도 높고, 꼼꼼하게 교정교열 봤고, 장정 좋다면, 다 제대로 만들었다면 잘되리라고 봅니다. 자신 있게 만들면 가격도 제법 세게 붙일 수 있어요.” 하지만 결국 공들인 책이 상업적으로 실패했을 때의 낭패감이 없을 리 없다. “모든 게 다 결과 위주라서 과정은 괄호 안에 들어가버리는 것, 그게 제일 씁쓸하죠. 어쨌든 마지막은 수금이에요. 회사라는 건 기본적으로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단위인데, 그 기본이 안 채워지면 아무래도 다음을 얘기할 수 없잖아요.”

여러 어려움과 다채로운 과정 속에서도 편집자로서 가장 기쁠 때는 “책상에 새 책이 딱 놓여 있을 때”다. “그 전까지는 다 예비물이고 임시물인데, 어엿한 책 한 권이, 그 실체가 내 눈앞에 와 있잖아요. 반갑고 고맙죠. 그 순간이 매력이자 또 마력이기도 하죠.”

정년퇴직은 했지만 최 위원은 계속 교정지를 볼 생각이다. 따비 출판사 일과 외주 일을 병행하며 편집, 기획, 번역 등을 함께 할 계획이다. “눈만 받쳐준다면 10년 정도는 더 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편집자로서의 삶을 후회한 적은 없을까? “후회할 짬도 없었습니다. 보통 인생을 구가한다고 하지만, 언감생심이고요, 무엇에 종사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여기까지 굴러왔죠.” 하지만 최선을 다해온 것 아닌가? “‘최선을 다했다’ 이런 표현보다는 ‘한다고는 했다’라고 말하고 싶네요. 다른 사람 눈에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였다면 고마운 거고요. 식당 맛있는 데가 있으면 주변에 이렇게 권해요. ‘한번은 먹을 만할 거야.’ 제가 만든 책도, ‘좋은 책이다’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래도 한번은 읽을 만할 것이네’ 이렇게 표현할 거예요.” 그의 담담한 대답에서 자신의 삶과 일에 대한 단단한 자긍심이 느껴졌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최연희 위원이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최연희 위원이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아메리칸 파이’는 윤석열의 미래를 예언했을까 1.

‘아메리칸 파이’는 윤석열의 미래를 예언했을까

‘윤석열 수호’ JK김동욱, 고발되자 “표현의 자유 억압” 2.

‘윤석열 수호’ JK김동욱, 고발되자 “표현의 자유 억압”

60년 저항의 비평가 “요즘 비평, 논문꼴 아니면 작가 뒤만 쫓아” [.txt] 3.

60년 저항의 비평가 “요즘 비평, 논문꼴 아니면 작가 뒤만 쫓아” [.txt]

‘오징어게임2’ 영희 교체설에 제작진 “사실은…바뀌지 않았죠” 4.

‘오징어게임2’ 영희 교체설에 제작진 “사실은…바뀌지 않았죠”

만화 ‘워스트셀러’ 3화 - 그냥 막 쓴다고요? [.txt] 5.

만화 ‘워스트셀러’ 3화 - 그냥 막 쓴다고요? [.txt]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