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
이승렬 지음 l 그물 l 3만5000원
20세기 전반기 동아시아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갈림길이 있었고, 20세기 중반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에는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의 갈림길이 있었다. 이 갈림길들을 헤쳐온 한국의 근대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주체와 자주’라는 주관적인 의지의 영역을 중심에 놓는 경향이 있다. ‘비타협적인 항일무장투쟁’을 민족운동의 유일한 기준으로 한정짓는 접근도 그런 경향의 산물이다. 그러나 객관적 현실은 추상의 세계를 넘어서며, 훨씬 건조하기까지 하다. “도둑 같이 뜻밖에 왔다”는 함석헌(1901~1989)의 말처럼, 해방은 결국 한국인의 힘이 아닌 국제질서의 결과물로서 찾아오지 않았던가.
한말과 일제시기 사회경제와 식민정책을 연구해온 역사학자 이승렬은 <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에서 한국 근대사를 읽기 위한 새로운 관점을 제안한다. 지은이는 전작 <제국과 상인>(2007)에서 19~20세기 한국에서 성장한 부르주아지 세력을 분석한 바 있다. 이번 책에서는 이들 ‘상층 지주’ 세력의 성격을 더욱 뚜렷하게 밝히고, 이들이 한국 역사에서 어떤 구실을 담당했는지 파고들었다. ‘의회민주주의’를 한국 근대사의 핵심 열쇳말로 삼고, 이 유산을 만들었던 온건한 민족주의 세력의 출현과 성취에 초점을 맞추는 접근법이다. 국내와 동아시아 4국, 세계질서 등 세 가지 층위에서 하나로 맞물려 돌아가는 지은이의 분석은 탄탄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미국 정치사회학자 배링턴 무어(1913~2005)의 문제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1966)에서 무어는 전근대 사회가 근대로 진입할 때 상층 지주와 농민의 정치적 역할에 따라 민주주의·파시스트·공산주의로 분기된다고 주장했다. 기존의 단선적인 발전론과는 다르게 다양한 사회적 힘들의 작동과 결과를 본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동아시아를 보며, 지은이는 개항 이후 한반도에서 상층 지주 세력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읽어낸다. 조선왕조의 중심지인 기호 지역 지주 세력은 개항 이후에도 여전히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종속된 관료제에 기대고 있었으나, 관료제의 간섭이 적었던 호남 지주 세력은 ‘농업의 상업화’를 꾀하고 미래가 불투명한 공업에 투자하는 등 새로운 성격의 ‘진취적’ 지주로 성장해갔다.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해체되면서 이들은 구체제에 묶인 기존 지주 세력을 대체하여 새로운 사회 세력이 됐다.
1948년 8월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 모습. 역사학자 이승렬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의회주의라는 점진적·개혁적인 길을 낸 상층 지주의 존재를 파고들었다. 국가기록원 누리집 갈무리
이렇게 볼 때 한국의 근대 이행은 두 단계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갑오개혁과 광무개혁이 기존 관료적 상업체제 아래에서 추진된 1단계 근대화라면, 이것이 실패한 뒤 ‘진취적’ 지주 세력이 중심이 되어 주도한 근대화는 2단계다. 1919년 일어난 3·1운동은 이들 새로운 지주 세력에 기독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평안도 세력, 천도교 세력이 함께 연결되어 이룬 협력적 거버넌스, 시민적 네트워크를 제시했다. 이 세력을 대표하는 이는 전라도 고부 출신의 김성수(1891~1955)였다. 그는 지주 경영으로 축적한 자본을 바탕으로 서울로 올라와 학교(중앙학교)와 근대적 기업(경성방직), 언론사(동아일보사)를 경영했고, 식민지배에 대해 ‘자치론’ 등 타협적인 민족운동을 주창하다 친일행위를 했으며, 해방 뒤에는 남한 정부 수립 과정에도 참여했다.
그렇다면 김성수 같은 새로운 지주 세력이 추구한 가치는 무엇이었나? 지은이는 이들이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한 “진보적 자유주의” 세력이라고 본다. “제국주의 세력과 급진적 민족주의 사이에서 다원적 정치제도를 구성할 수 있는 사회 세력”이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동아시아 4국에서 상층 지주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로 성장한 곳은 한국이 유일하다고 주장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농민을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룬 중국과 북한에서는 상층 지주 세력이 소멸하고 전체주의가 등장했다. 관료제가 근대화를 이끈 일본에서는 의회주의를 도입했지만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독립은 미약하다. 이와 달리 온건하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의회주의를 추구해온 세력이 있었던 한국에서는 서로 다른 세력들이 갈등·협력할 수 있는, 비교적 다원적인 정치 영토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평가다. 활동적이고 독립적인 시민의 존재에 기반한 의회민주주의는 농지개혁이란 진보적 과제를 수행하거나 이승만 독재를 막아서는 데에도 거점이 됐다고 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민족, 자본주의 진영의 극우적 노선’이 아니라 여러 계통의 정치 세력이 통합된 중도노선이 실현된 것이고, 대한민국은 불안정한 상태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의회주의를 토대로 한 공화정에 의해 운영되기 시작했다.”
인촌 김성수(왼쪽·1891~1955)와 고하 송진우(1890~1945). 개항 이후 등장한 호남의 ‘진취적’ 지주들인 이들은 온건한 민족주의 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누리집 갈무리
지은이는 세계사 차원에서 국제질서의 흐름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3·1운동에 계기를 제공했듯, 19세기 초 빈 회의에서 형성된 ‘세력균형’ 패러다임은 20세기 초 파리강화회의에서 시작된 ‘집단안보’ 패러다임에 의해 해체되고 있었다. 당시 세계질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큰 변수는 미국이었으며, 결과적으로 미국의 ‘집단안보’ 체제 참여가 한반도 해방에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한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이 소련 또는 중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국제사회를 바라보고 있었다면, ‘실력 양성’을 도모한 온건한 민족주의자들은 미국이란 변수에 기대를 걸었다. 해방 뒤 한국에 찾아온 것은 국제연합 중심의 집단안보 체제와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는 세력균형 체제의 이중적 질서였다. 지은이는 당시 필요한 것은 이 이중적 질서를 끊어낼 “한국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협력과 연대”였으나, 서로 끝없이 분열하기만 한 좌우 급진주의 세력들이 “민족주의를 앞세워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위해 대중을 이념 갈등의 소모품으로 소비해 버렸다”고 비판한다.
이 대목에서 지은이가 진짜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드러난다. “내적인 힘보다 외세라는 변수가 때로는 역사적 결정요인이 되었던 한국 근대사의 특수성은 이성보다 감성에 의존하는 역사 인식의 원인이다. 정의를 독점하려는 도덕적 민족주의와 반공주의 때문에 민족주의가 분열되고 분단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비타협적이고 비자본주의적이고 비부르주아적 민족주의를 유일한 ‘역사의 도덕’으로 설정한다면, 우리는 ‘선택적 기억’에 기대는 파당적 역사인식과 그에 따른 끝없는 분열만 겪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지은이는 ‘경제성장’, ‘발전’에 매달리는 식민지근대화론이나 ‘비타협’, ‘민족 정통성’ 같은 추상의 세계를 기준으로 삼는 민족사학 모두 “단선적 발전사관”에 머물고 있으며, “적대적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리고 “사회적 토대로서 한국 사회의 발전을 떠받친 점진주의에 대한 재발견은 급진적인 좌파와 우파의 역사 인식의 싸움터를 생산적인 경쟁과 공존의 무대로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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