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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아무리 혐오를 심어봐, 여기선 꽃이 피어나지

등록 2021-12-17 04:59수정 2021-12-17 23:20

세계적 비평가 올리비아 랭
“위기 속 예술은 해독제 역할”
지금도 유효한 그들의 고난과
예술이 안내하는 환대의 풍경
“나는 예술이 아름답거나 희망적이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나를 사로잡은 예술 작품은 대개 그 두 가치의 거래를 거부한다. 나의 더 큰 관심사는 (…) 예술이 저항과 회복에 관련을 맺는 방식에 쏠려 있다.” 영국을 대표하는 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 올리비아 랭은 위기일수록 예술 작품의 ‘회복적 읽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Suki Dhanda
“나는 예술이 아름답거나 희망적이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나를 사로잡은 예술 작품은 대개 그 두 가치의 거래를 거부한다. 나의 더 큰 관심사는 (…) 예술이 저항과 회복에 관련을 맺는 방식에 쏠려 있다.” 영국을 대표하는 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 올리비아 랭은 위기일수록 예술 작품의 ‘회복적 읽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Suki Dhanda

이상한 날씨
올리비아 랭 지음, 이동교 옮김 l 어크로스 l 1만7000원

위기 속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예술로 바이러스에 대응할 수 없고, 기후위기를 막을 수 없고, 선거에서 이길 수도 없다. 그런데 예술은 우리가 가진 “해독제”였다는 진실을 깨우치는 이가 있다. 영국 문화·예술 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 올리비아 랭이다. 그의 네 번째 산문집 <이상한 날씨>는 예술이 어떻게 혼돈 가운데 정화(카타르시스) 작용을 하는지 역력히 보여준다. 그가 지닌 고전적 관점이 펼쳐 보이는 풍경은 조금도 낡지 않았다.

랭의 목소리가 더욱 믿음직한 이유가 있다. 그가 고독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섬세한 감관으로 소외된 존재의 심연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연대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전작 <외로운 도시>는 17개 나라에서 출간되며 많은 독자의 지지를 얻었다. 접촉이 잠재적으로 위험을 동반하게 된 오늘날, 외로움을 자처하면서 우정을 표현해야 하는 역설의 시대에, 랭이 제시하는 예술론은 접촉하지 않아도 가능한 위로의 한 형태다.

‘장르 믹서’로도 불리는 랭의 산문은 비평, 연구, 전기, 개인적 서사를 혼합한 독특한 스타일이 특징이다. 책의 구성 역시 에세이, 칼럼, 서평, 대담, 러브레터 등 다양한 형식의 글로 짜였다. 한 편의 글마다 그가 매료되었던 미술가, 소설가, 음악가, 영화감독 등 예술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한다. 그리고 그 예술가로부터 “삶을 방해받은 이들”의 독한 이야기를 듣고 “인간성을 회복하는 주문”을 받는다. 그렇게 빚은 태도는 단호하다. “혐오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더 할애하고 싶지 않다. 대신에 환대가 이루어지는 공간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그 정원의 경계선은 지평선뿐이었네

랭이 “예술가가 되는 것, 정치적이 되는 것의 의미를 모두 그에게서 배웠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 영국 영화감독 데릭 저먼(1942~1994)에 대한 에세이부터 들어보자. 랭은 10대 시절인 1990년대 초반 저먼의 책 <모던 네이처>에 빠져든다. 저먼은 “에이즈의 대명사”였다. 자신이 에이즈 환자라는 사실을 공개한 드문 유명인. 당시 랭도 “저주와 재앙을 목전에 두고” 살았다. 신체적, 정신적 고립 말이다. 엄마가 레즈비언이었다. ‘섹션 28’(1988년부터 2003년까지 존재했던 영국의 동성애 금지법)이 시행되던 때다. 한마디로 국가로부터 “찍힌” 가족이었다.

그런 랭에게 저먼은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이며 즐거운 삶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인물이다. “그가 문을 열고 우리에게 정원을 보여주었다. 그가 직접 일구어낸 기발하고 알뜰한 낙원. 나는 삶의 본보기 같은 걸 믿지는 않지만 지금에 와서 자문해봐도 저먼이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저먼은 가뭄, 강풍, 잎을 태우는 소금기 같은 기상 현상이 잦은데다 원자력발전소가 지척인 땅에서 “불가능한 오아시스”를 만들기 시작한다. ‘빈곤의 미학’으로도 불리는 그의 영화처럼 소자본으로, 손으로 직접. “거름을 나르고 조약돌밭에 구멍을 판 뒤 올드 로즈와 무화과나무를 꼬드겨 꽃을 피움으로써 그의 영화 속 배우들처럼 황홀한 매력을 뽐내게” 했다. 비록 친아버지로부터 ‘팬지’(남성 동성애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 같은, 식물에 빗댄 혐오 발언을 듣고 자랐지만.

아름답게도, 그 정원의 “경계선은 지평선뿐”이었다. 저먼은 대화와 협업에 벽과 울타리를 치지 않았다. 자신의 영화를 보러 극장에 오는 관객보다 훨씬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주말마다 정원을 방문하는 걸 행복해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랭에게 저먼의 최고 작품은 “환대”의 공간, 정원인 셈이다.

치료도 못 받고 에이즈로 죽어 나가는 사람들과 폭발할 것 같은 원전을 마주한 채 살던 저먼의 걱정은 기후위기로도 이어졌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을까? 과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괴된 게 아닐까? 우린 이제 뭘 해야 할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지금 당장 로즈마리를 심어야 한다.” 그에게 정원은 “공포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연금술”이었다.

“꽃향기를 맡을 수 있을 때 맡으세요”

&lt;이상한 날씨&gt; 영문 표지에 쓰인 사진은 데이비드 워나로비치의 1991년작 사진 ‘무제(흙 속의 얼굴)’다.
<이상한 날씨> 영문 표지에 쓰인 사진은 데이비드 워나로비치의 1991년작 사진 ‘무제(흙 속의 얼굴)’다.

미국 화가 데이비드 워나로비치(1954~1992)에 대한 랭의 사랑도 각별하다. 극적인 삶이었다. 가정폭력으로부터 도망쳐 자발적 노숙인이 된 10대 동성애자 워나로비치는 1980년대 키스 해링, 장미셸 바스키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스타 예술가로 성장했다. 타임스스퀘어를 오가는 소아성애자에게 비쩍 마른 몸을 팔던 날들, 너무 배고픈 나머지 아이들의 팔다리를 입에 물고 가는 쥐 떼의 환영을 보았던 일, 연인이던 사진작가 피터 후자의 에이즈 투병과 죽음, 그리고 몇달 뒤 자신 역시 마주하는 에이즈 진단….

워나로비치의 자서전 <칼날 가까이> 곳곳에서 “종이 울리듯 반복되는 주문” 앞에 랭은 멈춰 선다. “꽃향기를 맡을 수 있을 때 맡아라”. “단순한 말 같지만 건강과 사랑에 얼마나 많은 장애물이 위력을 발휘하는지, 쾌락을 누리는 데 어떤 용기가 필요한지 생각하면 전연 단순하지 않”은 말이다. 그는 에이즈로 죽어가는 벗의 모습을 사진으로 세밀하게 기록하며 죽음을 응시한다. 본인이 죽기 얼마 전에는 사막에 누운 자신의 얼굴을 찍기도 했다.(무제(흙 속의 얼굴), 1991) 얼굴이 반쯤은 흙으로 가려진 채다. 흥미로운 점은, 땅속에 묻히는 중인지 밖으로 나오는 중인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눈은 감았지만, 입은 벌렸고 뭔가를 말하려는 듯 치열이 강조된 사진이라서다. “그는 우리에게 가르친다. 침묵이 곧 죽음이라면, 예술은 언어요 곧 삶이라고.”

워나로비치에게서도 랭은 타인을 위한 “벤치”를 발견한다. 워나로비치 역시 자신이 겪은 일에만 골몰하지 않았다. “이미 만들어진 세상”에 의해 묵살을 강요당한 이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두었다. 1991년 출간된 <칼날 가까이>에선 유색인종을 대하는 미국 경찰의 차별적 행태, 임신중단권의 약화를 포함한 타인의 고통이 반복해서 다뤄진다. 그의 고난은 2021년, 지금도 유효하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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