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만에 두 번째 소설집을 펴낸 임솔아 작가. 압축과 생략으로 빚은 특유의 시적 문장으로 꿈과 재능을 위해 계속 노력할 힘을 잃은 이들을 담담히 위로한다. “그만두지 않고 엉성하게 같이했으면 좋겠어요.” 문학과지성사 제공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임솔아 지음 l 문학과지성사 펴냄 l 1만4000원
자신이 한 말의 종착지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이를 어떻게 쉽게 지나칠 수 있을까. 내가 한 말은 물론 상대가 듣는다. 하지만 나도 듣는다. 상대는 잊어버려도 나는 잊기 어렵다. 내가 한 말을 가장 오래 간직하는 이는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런 이유로, 생각과 언어를 다듬고 정제하는 일은 자기존중(자존)의 방법일 수 있다.
임솔아의 두 번째 소설집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에서 그런 인물을 자주 만난다. 소통의 궤적으로 화자-청자의 직선을 그리지 않고, 화자에서 청자를 거쳐 다시 화자로 돌아오는 긴 곡선을 그리는 인물.
아홉 편의 단편 가운데 ‘그만두는 사람들’ 속 ‘나’는 홀로 낯선 섬에 와 있다. 작가로서의 일상을 ‘그만두고’ 노루섬이란 곳에 머물고 있는데, 지인 ‘재연’과의 이메일 소통은 이어지는 중이다. 두 사람 모두 지속보다 단속의 세계에 있다. 뜯겨 나가기 쉽게 미리 고안된 절취선처럼, 이어짐과 끊어짐이 촘촘하게 이어지는 불안한 삶.
미술작가 재연은 최근 동료의 자살 소식을 접했다. 그 동료는 유명했지만 프로젝트 기회는 매번 놓쳤다. 이슈마다 목소리를 내던 그는 “협조적인 사람을 찾고 있다는 통보”만 받고 또 받았다. 미술을 포기하고 생업을 찾고 싶다던 동료에게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아도 된다”는 말을 못 해준 것이 미안하다고 재연은 내게 썼다. 나는 재연에게, 허술한 위로 대신 2년 전 문학계에서 벌어진 비슷한 부조리를 담담히 써 보낸다. 문학계 권력 남용 문제를 이슈화한 내 동료의 이름을 이제는 아무도 부르지 않는다고. 그리고 나는 취업을 해보려 이력서를 썼다고 알리며 메일을 마무리한다. “다른 길을 가보려고 도전이라는 것을 해봤구나, 나도 달라질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뒤, 나는 “재연에게 다시 메일을 썼다”. 임솔아의 문장들엔 형용사가 최소화되어 있는데, 그럼에도 스스로를 복기하고 생각과 언어를 고쳐 전하는 사려 깊은 이의 감정이 투명하게 형용된다. 저 문장의 앞뒤는 시의 연을 구분하듯 깨끗이 비워져 있다. 그리고 새로 쓴 메일. “관두자,라는 마음에, 더 해보자,라는 말을 하는 것. 그거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그런 말이 사람을 고통으로 몰아간다는 걸 알고 있는데, 미안합니다.”
친구가 뜬금없이 보내곤 하던 당황스러운 문자를 떠올린다. “살아 있어야 돼”. 일을 지속하든 그만두든 “살아 있어야 된다는 그 말이 정말로 그저 살아 있어야 된다,라는 뜻임을” 더디게 이해하는 하루가 더해진다. 재미나 성취를 구하는 건 바라지도 않고, 일단 살아남고 보자는 말. 내가 살아남아야 할 곳인 문단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나’라는 주어를 ‘동료’라는 주어로 야금야금 바꾸”게 되지만, 부디 살아 있자고 말할 수 있는, 그만두지 않고는 못 견딜 지경에 몰렸던 사람과 함께할 때 그나마 “나는 편안했다”.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당시 발표한 소설로 습작생 시절 성폭력 피해 경험을 담은 작품 ‘추앙’이 포함된 첫 소설집을 거쳐, 이번 소설집은 인물에게 부여된 ‘역할’을 통해 개인과 관계의 변화를 차분하게 바라본다.
‘초파리 돌보기’에선 국수를 소화시키지 못하지만 국수를 좋아하는 남편과 아이를 위해 수십 년간 국수 요리를 한 ‘원영’이 있다. “텔레마케팅 사무실에서 헤드셋 너머로 종일 욕설을 듣는 여자”, “식기세척기를 구입하면 어떻겠냐고 물으면서도 책상이 필요하지 않으냐고는 한 번도 묻지 않는 가족”에게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제공한 여자. 원영은 과학기술원에서 초파리 돌보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나만의 책상과 깨끗한 가운이 주어졌다. 처음으로 사회에서 존중받는 경험을 한 원영은 초파리 떼가 조금도 징그럽지 않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을 잃는다. 딸 ‘지유’는 산재를 의심하지만 원영은 그럴 수 없다. 원영이 원하던 역할을 제공해준 곳을 부정할 수 없다. 소설가 지유는 엄마에 관한 글감을 모은다며 원영이 숨기려는 이야기를 끌어내고, 무엇이 원영의 건강을 망가뜨렸는지 찾으려 하지만 원영이 바라는 소설의 결말은 ‘소박’하게도 이렇다. “오래오래 행복하다.” 오래오래 행복했다, 가 아니라 행복하다. 동화 속 가장 오래되고 “시시한 문장”이 현재 속으로 산뜻하게 걸어 들어온다.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로 신동엽문학상(2017)을 받기도 한 작가의 시재가 반짝이는 대목이다.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는 사회가 짜놓은 역할극이 어떻게 개인 내면의 핵심까지 꿰찌르는지 보여준다. ‘나’는 수도권 아파트를 산다. 날림으로 짓고선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일부러 부도를 낸 뒤 사라진 시공사의 건물이었다. 곰팡이와 락스를 끼고 계속 살 순 없다. 보험을 통해 하자 보수공사를 하려면 입주민들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하자가 심하지 않은 세대 주민은 내 연락을 받지도 않는다. 결국 산정 금액을 높여 공사 뒤 남는 보험금을 나눠 갖자는 제안을 해야 했다.
제도를 악용해 모두를 공모자로 만드는 ‘꼼수’로 겨우 동의서를 받았을 때, 공사 뒤 그 집을 팔려고 김장 봉투를 사서 어지러운 살림을 집어넣고 옥상에 숨겼을 때, 집을 모델하우스처럼 잠시 꾸몄을 때, 그걸 보고 집을 사겠다는 사람을 “낚았”을 때, “매번 웃지 않을 수 있는 쪽을 선택해”온 나는 “웃고 있었다”. 웃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스스로 “선택”한 무표정은 “가장 만족”스럽고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였지만, 웃음은 자신만의 공간을 유지하려는 작은 소망의 틈으로 날카롭게 몸을 내밀었다. 얄궂게도, 살아남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장소인 집에서, 스스로 설정한 역할(무표정)이 제도가 부추긴 역할에 무력하게 지는 순간이다. 임솔아의 인물은 계속 지지 않는다. 새로운 역할을 개척한다. 말간 무표정을 되찾기 위해.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