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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나라 걱정 말고 국민 걱정

등록 2021-12-10 04:59수정 2021-12-10 09:35

[한겨레Book] 강명관의 고금유사

경기도 어떤 고을의 수령을 지내는 이가 윤기(尹愭, 1741~1826)를 찾아왔다. 그해는 농사형편이 지난해에 비해 약간 좋았던 모양이다. 윤기가 말을 꺼냈다. “올해는 약간 풍년이 들었으니, 백성들 걱정은 좀 덜해도 되겠군요.” 그런데 그 수령의 말이 딴판이다. “어느 겨를에 백성을 걱정한단 말입니까? 그저 관아 살림이 걱정이지요.”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이 백성을 걱정할 여유가 없고, 그저 관아가 돌아가는 데 필요한 돈이 걱정이란다. 이어서 하는 말이 걸작이다.

“지금 나라 재정이 바닥이 나서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돈마저도 여기서 꾸어 저기를 메우고, 저기서 빌려 여기를 막는 형편입니다. 경기도에 내려온 재결(災結)도 4백 결밖에 되지 않으니, 이건 한 고을에 나눠 주어도 부족한 형편입니다. 경기도 한 도에는 어림도 없는 양이지요.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백지징세(白地徵稅)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정에서 중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재상이 ‘지금 나라 재정 상황을 고려하건대 백성의 사정은 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하였답니다.”

‘재결’은 흉작으로 거둘 것이 없는 면세 대상지를 말한다. 곧 중앙에서 경기도에 재결 얼마를 나눠주면, 그것을 흉작이 든 전지(田地)에 분배한다. 예컨대 내가 5백 평의 재결을 받으면, 나의 땅 5백 평에서 내게 되어 있는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재결은 가을의 수확 상황을 점검해 나라에서 으레 분배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지방에 분배해 주는 재결의 양이 워낙 적다. 국가의 재정이 워낙 부족하다는 것이고, 이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근거 없는 세금을 강탈(백지징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조정의 재상 중에는 “나라의 재정 상황을 고려하건대, 백성의 사정은 돌아볼 겨를이 없다”는 말을 태연히 내뱉었던 것이다.(참고로 말하자면, 관직에 있는 자들이 워낙 털어먹어 그렇지 재정 부족은 사실이 아니다.)

적은 양이나마 분배한 재결은 백성의 몫으로 돌아갔는가? 정약용은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민간에 있었지만, 백성들이 재결을 받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오직 뇌물을 바쳐야 벼가 누렇게 익은 논도 흉작이라고 보고하고 세금을 면제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결을 나눠주는 것이 모두 헛일이라고 말한다. 정작 재결을 받아야 할 가난한 농민들은 아무런 혜택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윤기는 국가의 재정 때문에 백성의 사정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는 그 재상의 말을 ‘나라를 잃을 결정적 한 마디’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은가. 그에게는 ‘나라’가 중요했지 ‘백성’은 관심 밖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민심을 잃으면 나라를 잃게 마련이다.

코로나 새 변이 오미크론 때문에 일상회복이 중단된단다. 국민들은 그저 또 그렇게 따를 수밖에 없다. 6명만 모이라면 모이고 8명이 모이라면 모일 뿐이다. 백신을 또 맞으라면 또 맞는다. 그런데 한 마디 물어보자. 그러면 ‘나라’는 국민들에게 무엇을 해 주는가? 조선시대와는 달리 세금을 넘치도록 끌어모았다던데, 그저 ‘나라’만 걱정하는가? 나라의 곳간 열쇠를 움켜쥔 높으신 양반들은 ‘국민’ 걱정은 하지 않는 건가? 이러다가 정말 ‘나라’를 잃는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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