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유럽에서 나타난 병 ‘둔주’
강박적으로 집 떠나 목적 없이 배회
20여년간 유행…시대 변하자 사라져
정신질환 실재성에 대한 질문 제기
강박적으로 집 떠나 목적 없이 배회
20여년간 유행…시대 변하자 사라져
정신질환 실재성에 대한 질문 제기
그는 왜 미친 듯이 세상을 돌아다녔는가
이언 해킹 지음, 최보문 옮김 l 바다출판사 l 1만7800원 1886년 1월17일 프랑스 보르도 생탕드레 정신병원에 스물여섯살의 젊은 남자가 입원했다. 보르도가 고향인 장 알베르 다다(1860~1907)라는 이름의 가스 정비공이었다. 그는 12살 때 견습생으로 일하던 중 갑자기 사라졌다. 형이 근처 마을에서 우산 장수를 돕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어깨를 두드리자, 잠에서 깨어난 듯 왜 자신이 거기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어느 날 갑자기 여행에 대한 욕구에 사로잡혀 무작정 길을 나섰고, 낯선 곳에서 제정신을 차리고 나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가족을 버리고 일도 내던지고 일상의 삶도 내동댕이친 채, 그는 엄청난 속도로, 오로지 앞으로 앞으로만, 때로는 하루에 70㎞씩, 종국에는 부랑죄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힐 때까지 쉼 없이 걸어갔다.” 그의 ‘여행’은 점점 길어져, 보르도를 넘어, 파리, 마르세유, 벨기에, 독일, 오스트리아, 알제리, 러시아, 터키까지 이어졌다. 때로 기차와 배를 탔고 주로 걸어 다녔다. 잡역부 일로 돈을 벌거나 구걸을 해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오지만,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종적을 감추곤 했다. “알베르는 ‘여행을 떠나려는 긴박한 욕구’ 때문에 자신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오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알베르는 여행하기를 원했고 어릴 때부터 머나먼 곳의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알베르의 치료를 맡게 된 정신과 의사 필리프 티시에(1852~1935)는 알베르에게 최면을 걸었고, 그는 잊고 있던 몇 주 전, 몇 년 전 여행의 세세한 부분까지 다 기억해냈다. 티시에는 1887년 ‘미치광이 여행자’라는 제목의 박사논문을 통해 ‘둔주’(遁走, fugue, 단어의 원래 의미는 도주)라는 이 새로운 정신질환을 학계에 처음 보고했다. 이후 비슷한 사례들이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에서 잇달아 보고되기 시작했다. 둔주의 전형적 증상은 “강박적 도주 행동, 목적 없이 방황하기, 기억상실, 최면에 의한 기억복구” 등이었다. 당시 정신의학계는 둔주의 원인을 둘러싸고 ‘히스테리아냐 간질이냐’는 논쟁을 벌였고, 치열한 논쟁 덕에 이 질환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1909년 프랑스 낭트에서 열린 정신의학 총회를 끝으로 둔주에 대한 관심은 식어갔다. 오늘날에는 일반인은 물론 정신과 의사들에게도 잊힌 질환이 됐다. 2013년에 나온 미국정신의학협회의 <진단과 통계 요람(DSM) 5판>에는 해리성기억장애의 여러 증상 중 하나로만 기술돼 있다. <미치광이 여행자>는 19세기 말 유럽에서 유행했던, 현대에는 다소 생소한 둔주라는 정신질환을 소개한다. 하지만 지은이가 과학철학자라는 점에서 눈치챌 수 있듯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전달하기 위함은 아니다. 둔주 사례를 통해 정신질환과 문화적 맥락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정신질환의 ‘실재성’이라는 문제로 독자를 이끈다. 지은이는 둔주를 ‘시대적 정신질환’(transient mental illness)의 일종으로 규정한다. 이는 “어느 한 시대, 어느 공간에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정신질환”이다. 시대적 정신질환이 어떤 조건에서 등장하고 쇠퇴하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책의 초점이다. 지은이는 시대적 정신질환을 번성하게 하는 환경을 생물학 용어를 빌려 ‘생태학적 틈새’(ecological niche)라고 표현한 뒤 이 틈새를 만드는 여러 요소들(‘벡터’)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의학이다. 정신적 ‘질환’이 되기 위해서는 질병분류법이라는 체계 안에 들어와야 한다. 둔주는 히스테리아든 간질이든, 어느 쪽으로도 속할 수 있어 분류체계 안으로 쉽게 진입했다. 두 번째는 ‘문화적 양극성’으로, 동시대 문화의 두 가지 요소 중간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둔주는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던 관광여행과 범죄로 취급됐던 부랑 사이 경계에 놓여 있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둔주가 양쪽 사이에서 찾아낼 수 있는 “매우 좁은 폭의 선택지”였다. 세 번째는 ‘가시적 식별 가능성’이다. “고통이 뚜렷이 보여야 하고, 환자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애써야 한다.” 둔주 환자들은 여러 이상행동을 보여 눈에 쉽게 띄었다. 네 번째는 질환으로 인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어떤 ‘해방구로서의 기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둔주는 “스스로 범죄적 일탈을 저지를 수는 없었으나 일상의 삶과 평범한 사람들 속에 녹아들지 못했던 남자들에게 해방구로 기능했다.” 결국 시대적 정신질환은 오직 틈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틈새를 만들어낸 벡터들의 힘이 흩어지면 틈새도 없어지고 시대적 질환도 사라진다. 100여년 전 정신질환에 대한 긴 분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은이는 “현재 우리는 온갖 정신질환에 둘러싸여 있는데, 그 많은 신경증 중 어떤 것이 꾸며낸 것인지, 문화적 산물인지, 의사가 확대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카피캣 증후군 같은 모방에 불과한 것인지, 모호한 말이긴 하나 단적으로 말해서 어느 게 실재하는 것인지 궁금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은이는 이어서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거식증, 폭식증, 해리성정체성장애, 반사회성인격장애 등 일부 질병들을 둘러싼 논란들을 거론하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판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대신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의 주장(“실재란 인간의 삶과 언어의 변화에 따라 그 개념을 재조정하는 끝없는 과정에서 찾아지는 것이다”)에 기대어 말한다. “질환의 실재성이라는 개념은 퍼트넘이 말한 대로 현시점에서 재조정될 수밖에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 이유는 생물학적·생화학적 정신의학이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 실재하는 정신질환이 무엇인지는 철학이 아니라 의학이 조만간 밝혀내게 될 것이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최초의 둔주 환자 장 알베르 다다(가운데)에게 그의 주치의 필리프 티시에(왼쪽)가 최면을 걸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 바다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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