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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모성 위로 공포가 살포된다

등록 2021-12-03 04:59수정 2021-12-03 19:10

[한겨레Book]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피버드림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조혜진 옮김 l 창비 (2021)

아만다는 어린 딸 니나를 데리고 아르헨티나 시골 지역으로 휴가를 왔다가 이웃 여인 카를라를 만난다 . 카를라는 남편 오마르가 비싼 값을 치르고 빌려온 고급 종마가 개울물을 마시고 쓰러진 다음 날 퉁퉁 부은 모습으로 죽었고 같은 개울물을 마신 어린 아들 다비드 역시 죽을 위험에 처했지만 , 마을 사람들이 병원보다 의지하는 ‘녹색 집 ’에 데려가 다른 아이와 영혼을 맞바꾼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대신 ‘괴물 ’이 되어버렸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 아만다는 카를라의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도 자신의 딸 니나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핀다 . 아만다는 자신과 니나 사이에서 팽팽하게 당겨졌다 느슨하게 풀어지길 반복하는 가상의 선을 ‘구조 거리 ’라고 부르는데 , 이 구조 거리는 아만다가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서 배운 개념이다 .

소설은 병원 침대에 누워 움직이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아만다와 그 옆에서 이 모든 불행의 시작점을 찾기 위해 아만다의 기억을 추궁하는 다비드와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 다비드는 아만다와 니나의 생명을 위협하는 ‘벌레 ’를 찾기 위해 아만다의 기억을 샅샅이 거슬러 오른다 . 카를라가 어린 다비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찾아간 녹색 집이라든가 영혼을 바꿔치기한 후 괴물이 되어버린 다비드가 수상쩍은 행동을 한다든가 하는 진술을 통해 소설은 얼핏 주술과 환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 아만다와 다비드가 끝내 찾아낸 이 모든 일의 출발점은 너무도 현실적이고 동시대적이다 . 다비드의 길잡이와 아만다의 회상에 기대어 함께 탐색에 나섰던 독자는 차갑고 축축한 공포의 실체를 마주하고 비로소 전율한다 . 진짜 재앙은 ‘너무 미미해서 감지하기 어려운 ’ 기척으로 슬그머니 다가오고 언제나 그렇듯 문제의 본질에는 초현실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 , 혹은 인간의 탐욕이 자리한다 .

자연보다 개발과 이윤이 훨씬 중요하게 취급되는 시대에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환경 위기라는 재앙을 불러온 것은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 그러나 재앙의 출발점이 편파적인 만큼 재앙의 결과 역시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 . 재앙을 불러온 자와 재앙의 결과로 타격을 입는 자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불안과 공포를 자욱하게 피워올린다 . 재앙으로 아들의 본모습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카를라 , 그리고 같은 재앙으로 어린 딸과 자신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진 아만다는 재앙의 한복판에서 언제나 가장 취약한 존재로 추락하고 마는 ‘어머니 ’이다 . 자의든 타의든 어린 인간을 사랑하고 지켜야 하는 어머니들은 재앙이 닥쳐올 때마다 구조 거리를 팽팽히 당기며 불안과 공포로 자신을 옭아맨다 . 그러므로 아이를 지켜야 할 때마다 팽팽해지며 자신의 숨통마저 함께 조이는 구조 거리는 모성 이데올로기 혹은 모성 신화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 목가적이고 평화로워 보이는 아르헨티나의 너른 평야에 살인적인 농약이 소리 없이 살포되듯이 언뜻 아름답고 숭고해 보이는 모성 위로 현대가 불러온 공포가 조용히 살포되고 있다 .

소설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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