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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지제크다움에는 미완결이 있다”

등록 2021-11-26 05:00수정 2021-11-26 20:08

전세계적 유명세 떨친 스타 철학자
학자 8명이 다양한 분야에서 비평
헤겔 철학, 양자역학, 탈식민주의 등
“무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

지젝, 비판적 독해
이언 파커·슬라보이 지제크 등 지음, 배성민 옮김 l 글항아리 l 1만9800원

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72)는 코로나19 등 이 시대 자본주의 체제가 드러내는 현실의 각종 모순들에 끊임없이 개입하며 여전히 활발하게 자신의 사유를 펼치고 있는 학자다. 반복적이라거나, 체계적이지 않고 모순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되지만, “열려 있고, 부정적이며, 결정되어 있지 않아야 한다”는 특성에 힘입어 그의 이론은 늘 새로운 사유의 자원을 제공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 국내에서 출간된 <지젝, 비판적 독해>(원제는 Žižek Now: Current Perspectives in Žižek Studies, 2013년 출간)는 지제크 이론에 대한 학자 8명의 비평적 작업들을 모은 책이다. 머리말을 쓴 자밀 카더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발전을 고려하여 그 가치를 평가한 저서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며 “지제크 사상이 다양한 분과학문에 어떤 유용함과 의미를 부여하는지 탐구하고, 서로 다른 영역에서 그의 작업이 부여한 의미와 부여하겠다고 약속한 의미를 평가해보겠다”고 밝혔다. 지제크 이론의 핵심을 정리하는 한편, 독일 관념론, 양자물리학, 생태학, 탈식민주의 등 다양한 영역에서 그가 미친 영향을 비평적으로 포착한다.

지제크는 마르크스주의, 라캉의 정신분석학, 헤겔 철학을 자신의 중요한 사상적 자원으로 삼는데, 이 가운데 날이 갈수록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헤겔 철학이다. 토드 맥고완이 쓴 ‘마르크스주의자 헤겔’은 책 마지막에 붙은 지제크 자신의 글 ‘왕과 천민, 섹스 그리고 전쟁’과 함께, 지제크의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는 헤겔 철학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 사유를 잘 보여준다. 지제크가 헤겔로부터 새롭게 이끌어낸 것은 존재 자체의 ‘적대’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이다. 헤겔에게 ‘절대자’ 개념은 적대를 이기거나 초월해 도달할 수 있는 바깥의 것이 아니며, 존재는 적대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는 내재성에 머물 따름이다. 모순을 해결할 길이 저 바깥에 있다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다. ‘대타자’의 유혹이 끊어지고 어떤 외부적 해법도 없다는 것이 드러날 때, 비로소 주체는 대타자가 보장하는 안전을 치워버리고 “자신의 관점을 바꾸는 근본적 변형”을 통해 사회적 장 전체를 바꿀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이것이 ‘불가능성의 가능성’, 지제크가 말하는 ‘주체의 정치화’다. 특히 맥고완은 “지금은 타자됨을 존중하고 타자와 대면하는 것을 찬양하는 시대”라며, “이는 정치를 아예 떠나는 움직임을 대표한다”고 비판한다. “적대적 사회 구조를 동반하는 소외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다는 거짓 약속을 모두 물리치는” 지제크의 사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2012년 방한 당시 쌍용차 대한문 분향소를 방문해 해고 노동자들에게 연대와 지지의 뜻을 밝히고 있는 슬라보이 지제크의 모습. 박승화 &lt;한겨레21&gt; 기자 eyeshoot@hani.co.kr
2012년 방한 당시 쌍용차 대한문 분향소를 방문해 해고 노동자들에게 연대와 지지의 뜻을 밝히고 있는 슬라보이 지제크의 모습.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베리나 앤더맷 콘리는 “자본주의가 보편적이고 생태학은 개별적”이라고 선언하는 지제크의 생태학을 살펴본다. 지제크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지식소유권 등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유전공학 등 새로운 기술―과학적 발전의 사회윤리적 함의, 배제된 자들과 포함된 자들을 가르는 장벽 등을 자본주의의 네 가지 핵심 적대라고 꼽는데, 네 번째 적대가 나머지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인간이 초래한, 순수하게 우연한 생태학적 재난이 지구 전체에 미치더라도, 새로 생긴 빈민촌이라는 적대가 진짜 저항 지점이 된다. (…) 포함과 배제 사이의 적대에 주목하지 않은 채 환경을 위해 싸운다면 우리는 진짜 보편성에 이르지 못한 채 칸트가 말한 사적 관심에 머물게 된다.” 이 때문에 지제크는 ‘혁명적 평등주의 정의(justice)’를 강조하며 “배제된 자를 해방시키자는 맥락에서 생태학을 사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제크가 볼 때 자본주의 아래에는 진정한 생태학이 없다. 인간이 늘 되돌아가고자 애쓰는 조화롭고 균형 잡힌 자연은 우리의 생활세계를 이데올로기적 환상으로 포장하는 또 하나의 대타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되레 “자연이 빠진 생태학”이 필요하다. 콘리는 지제크의 이런 태도가 현실 속의 생태적 실천을 사소하게 여기고 철학적 논의만을 앞세우는 또다른 ‘에코 시크’(eco chic·친환경을 패션처럼 소비하는 태도)로 빠지진 않을지 우려의 말을 얹으면서도, “지제크의 혁명적 평등주의 정의는 생태학과 배제된 자를 하나로 모은다”고 평가한다. 늘 새로운 선택을 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지제크의 주장에 따라, 생태학이 지구상의 더 많은 문제들에 간여해야 할 실천적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탈식민주의와 관련한 논의를 다룬 두 개의 장에서, 에릭 포크트와 자밀 카더는 각각 지제크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내놓는다. 지제크와 프란츠 파농을 견줘보는 포크트는 “지제크와 파농은 ‘제3세계’를 정체성 정치의 용어로 정의하려는 유혹을 분명히 거부한다”고 본다. ‘불가능성의 가능성’과 ‘폭력’이 접점이다. 파농은 서구 문화를 향해 ‘자기’ 문화가 존재한다고 증명하려 애쓰는 식민화된 지식인은 정확히 식민주의 논리에 복종하고 있다고 짚은 바 있다. 둘 모두는 현실을 변화시키는 정치적 실천은 추상적인 보편 담화가 아니라 ‘가장 배제된 자’들이 겪는 종합될 수 없는 적대와 이들의 폭력으로부터 나온다는 데 주목했다. 특히 이들은 식민화된 주체가 자신의 상상적·상징적 정체성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며 ‘자신을 해치는 폭력’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현실을 바꾸는 혁명적 폭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봤다. “가장 배제된 자가 서 있는 위치와 동일시하는 몸짓이 파농과 지제크가 추구하는 정치를 지탱한다.”

반면 카더는 지제크가 ‘레닌을 반복하자’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레닌이 주목했던 “탈식민주의 주체에 내재된 혁명 잠재성을 지나쳐버린다”고 비판한다. 그가 볼 때 지제크는 제3세계 빈민가의 에너지와 생명력을 찬양하면서도, 이 공간이 “신자유주의적 세계 자본주의에 대항할, 미래의 혁명적 행위를 개시하고 체계를 완전히 변혁시킬 사건이 일어날 만한 장소가 되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카더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나서야 두 번째 ‘옳은 선택’을 위한 조건이 만들어진다”는 지제크 자신의 말을 상기시키며, 탈식민지 주체성이 품고 있는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레닌의 관점까지도 반복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언 파커는 “지제크는 자신이 틀렸을 때조차 우리 시대를 위한 사상가”라고 평가한다. 부정적 변증법을 견지하는 지제크에게는 온전한 체계나 곁쇠가 없기 때문에 되레 “오늘날 우리가 꼼짝없이 갇혀 있는 곳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파커는 특히 정치경제적 위기가 길어지면서 전세계적으로 개별 주체가 스스로에게 몰두하는 ‘심리학화’ 경향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는 이때에, 지제크의 사유가 더욱 긴급하게 요구된다고 말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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