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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사랑에는 부지런한 노동이 필요하다

등록 2021-11-19 05:00수정 2021-11-19 10:45

[한겨레Book] 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문지 에크리’ 시리즈로 낸 김소연 시인 산문집
사랑이란 가볍게 펄럭이는 말이 아니더라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김소연 지음 l 문학과지성사(2019)

“난 절대로 널 때리지 않을 거야. 믿어줘.” 나는 그에게 물은 적이 없는데, 매번 그는 다짐 같은 독백을 반복했다. 그와 처음으로 크게 다툰 날, 그는 말로 나를 때렸다.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며 시작된 그의 언어폭력은 온갖 메신저를 통해 날아왔다. 유일하게 영혼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며 나를 향한 사랑을 믿어달라던 그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의 약속은 왜 1g의 책임도 없이 그토록 가벼웠을까. 그에게 사랑과 믿음은 뭐였을까.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김소연 시인의 작은 책에는 내가 경험한 수많은 사랑 없는 사랑이 담겨 있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언어는 있지만, 정작 사랑에 필요한 구체적 노동은 없던 순간. 정직과 돌봄, 책임과 합의 없이 사랑이라는 말만 가볍게 펄럭이는 순간들이. 사랑한다는 말은 달콤해서 말하는 이와 듣는 이를 취하게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선언 이후 생활에서 시작된다. 생활의 구체적 질감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일은 말보다 백만 배 어렵다. 그건 내 위주로 한다고 전달되는 것도 아니고, 상대와 끊임없이 차이를 발견하며 협상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구체적 사랑은 내가 글쓰기 수업에서 강조하는 방향과 닮았다. ‘나는 정직한 사람이다’ 같은 선언적 표현 대신,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독자가 ‘이 사람은 정직하구나’라고 납득할 수 있게 표현하기. 몇 해 전 방영된 한 소개팅 프로그램의 예시를 들면, A가 자기의 이상형이 진지한 사람이라고 말하자 곧바로 B가 말한다. “저 엄청 진지한 사람이에요.” 그 순간 B의 모습은 얼핏 귀엽게 보였지만, 나는 그때가 진지함과 가장 거리가 멀어지는 순간이라고 느꼈다.

글을 쓸 때처럼, 말이나 감정에도 구체성이 더해질 때 힘이 실린다. 시인 역시 비슷한 의구심으로 글을 시작한다. 책의 첫 장에서 시인은 이런 의문을 던진다. “사랑이라는 말을 ‘설렘, 두근거림, 반함’ 같은 말로 곧바로 번역하는 사람들을 그녀는 싫어했다. 사랑이 주는 달콤함만을 취한 채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을 사람들로 보였다. 사랑으로부터 비롯될 고민과 문제와 시련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17쪽)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이 문장은 무수한 변주가 가능하다. 믿음에는 믿음이 없다. 돌봄에는 돌봄이 없다. 평화에는 평화가 없다. 화목에는 화목이 없다. 아름다운 미사여구는 고된 현실을, 기울어진 평형추를, 꾹 다문 입을 가려버린다. 시인은 추상어에 가려졌던 지난한 갈등과 불평등, 끝내 이해할 수 없는 타자와의 접속 불가능성과 이별의 파편을 책에 뿌려놓는다. 애초에 명확할 수 없는 주제이기에 책은 꼭 끊임없이 움직이는 지도 같다.

시인은 말한다. 사랑에 대한 개념을 정리한 책들은 주로 남성 철학자들에 의해 전유되어 왔고, 우리는 배우지 않았어야 할 것들을 배워왔다고. 이어서 말한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랑함은 사랑과는 다른 얼굴이어야 한다. 사랑은 사랑을 재배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랑을 돌아보고 돌보는 것이어야 한다. 사랑을 사랑해온, 사랑을 명사로 고정하는 사랑의 담론에 비켜서서, 사랑이 더 이상 감정의 영역에 머물러 있게 내버려 두지 않아야 한다.”(223쪽) 사랑함이라는 부지런한 동사 앞에서 나는 얼마나 사랑 있는 사랑을 해왔을까. 이 질문을 살아가고 싶다. 집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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