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2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지음, 김주일·김인곤·김재홍·이정호 옮김 l 나남 l 1권 3만6000원, 2권 2만8000원
기원후 2세기께 인물로 추정되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쓴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은 가장 온전하고 가장 오래된 서양철학사 문헌으로 꼽힌다. 서양에서 철학이 발흥하기 직전인 ‘7현인’의 시대부터 기원후 2세기에 활동한 회의주의학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다양한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고전 철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풍부한 재료를 제공해주는 귀중한 원전 자료다. 또 철학자들의 삶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을 열전 형태로 담고 있어 대중적으로도 널리 읽혀온 고전이다. 공동 독회 등으로 그리스·라틴어 원전을 깊이 연구해 엄정하게 우리말로 옮겨온 정암학당 연구원들의 노력에 힘입은 이 책의 새 우리말 번역본이 지난 6월 출간됐다. 이탈리아 출신 문헌학자 티치아노 도란디가 2013년 ‘케임브리지 고전 텍스트’로 새롭게 내놓은 최신 비판정본을 번역의 기준 판본으로 삼았다.
책은 서론 외 10권으로 이뤄졌으며, 기원후 2세기 시점에 이전 800년 동안 85명에 달하는 선대 철학자들의 계보를 크게 나누고 각 학파에 속한 철학자 각각의 생애와 사상을 정리해주는 방식으로 쓰였다. 서론에서 “철학은 두 가지 기원을 가진다”며, 아낙시만드로스에서 시작되는 ‘이오니아학파’와 피타고라스에서 시작되는 ‘이탈리아학파’ 등 두 가지 학통을 제시한다. 철학이 본격 등장하기 전인 기원전 620~550년 사이에는 탈레스를 비롯해 지혜로운 자들로 꼽혔던 ‘7현인’이 있었는데,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의 제자이고, 피타고라스는 페레퀴데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오니아학파의 계보는 그 뒤 아낙시메네스, 아낙사고라스, 아르켈라오스를 거쳐 “윤리학을 철학에 도입한” 소크라테스로 이어진다. 소크라테스로부터는 플라톤과 아카데미아학파, 아리스토텔레스와 소요학파, 안티스테네스 등 소(小)소크라테스학파와 제논의 스토아학파 등으로 계보가 갈린다. 이탈리아학파의 계보는 파르메니데스,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토스 등을 거쳐 에피쿠로스에 닿는다.
1 에피쿠로스학파를 창시한 에피쿠로스의 두상. 2 스토아학파를 창시한 제논의 두상. 3 ‘이오니아학파’와 구분되는 ‘이탈리아학파’로 분류되는 계보에 놓인 피타고라스학파의 창시자 피타고라스의 두상. 4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소크라테스의 두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책은 각 철학자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을 보냈으며 어떤 철학적 배경에서 어떤 주장을 펼쳤는지, 어떤 책들을 썼는지, 어떤 유언을 남겼는지 등을 추려 담고 있다. 무엇보다 사적인 측면에 대해서까지 잡다한 정보들을, 때론 서로 상충되는 정보들까지 여기저기 끌어모아 늘어놓았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예컨대 탈레스는 “어떤 사람들에 따르면 결혼도 하고 퀴비스토스라는 아들도 얻었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 의하면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그의 여동생의 아이를 자식으로 삼았다고 한다”는 식이다. 밀레토스 어부들이 발견한 세발솥이 ‘지혜로운 자’로서 탈레스에게 건네졌다는 이야기가 여러 판본으로 꼬리를 물며 장황하게 이어지기도 한다. 스토아학파의 창시자 제논은 “목이 기울어져 있”었고,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을 읽고 철학에 입문했다. 견유학파 철학자 크라테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지만 “(견유학파가 주창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는 상당히 창피해했다”고 전한다. 독자들이 헷갈리지 않도록 동명이인들에 대한 정리 등도 빼놓지 않는다. 물론 핵심으로 삼는 것은 각 철학자들이 주장한 학설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의 이론은 다음과 같다. 우주 전체의 근원은 원자와 허공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관습적으로 믿어지는 것들이다.(…)”(데모크리토스 편)
특히 다른 자료들에서는 거의 전해지는 바가 없는 에피쿠로스(10권)와 초기 스토아학파(7권)에 대한 부분은 이 책의 백미로 꼽힌다. 에피쿠로스와 관련해서는 10권 한 권을 그 한 명에게 할애했을 뿐 아니라 그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직접 쓴 편지 3통의 내용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우리가 에피쿠로스의 사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가장 자세한 문헌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옮긴이 해제) 지나친 식도락으로 하루에 두 번 토했느니 외설적인 말을 일삼았느니 하는 당대의 온갖 비방과 험담을 소개한 뒤, 지은이는 “이들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 비판하고 에피쿠로스의 편지를 전재하며 그의 진면목을 전한다.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우리가 말할 때, 일부 사람들의 생각처럼 방탕한 자의 쾌락을 말한다거나 관능적 향락에서 주어지는 쾌락을 말하는 게 아니라, 몸에 괴로움도 없고 영혼에 동요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 오히려 모든 선택과 회피의 원인들을 찾아내거나 가장 큰 소동이 영혼을 장악하는 데 근거가 되는 의견들을 몰아내는 각성한 헤아림의 능력이 유쾌한 삶을 낳는 것이다. (…) 이 모든 것들의 출발점이자 가장 큰 선은 분별이다.”(에피쿠로스 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초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지은이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대해선 기원후 2세기 정도에 살았다는 추정 외에는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으나, 책 속에서 드러나는바 철학적 소양 자체는 그리 깊지 않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에피쿠로스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했으나, 이것은 지은이가 특정 학파에 쏠렸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에피쿠로스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도 여겨진다.
옮긴이인 김주일 정암학당 연구원(학당장)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디오게네스는 고급한 철학적 배경을 지니지는 못했으며, 그보다는 흥밋거리를 쫓은 편집자로서의 정체성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이 책의 아이러니한 측면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헬레니즘 시기에는 기존 책들을 해체해서 새로운 책의 재료로 삼는 등 일종의 다이제스트가 유행하며 많은 책들이 사라졌는데, 흥미 위주로 만들어져 대중의 인기를 얻은 덕에 이 책은 되레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풀이다. 다만 흥미 위주로 잡다하게 서술된 이 책의 내용들로부터 “플라톤은 동성애자였다”,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의 두번째 부인이었다” 등 서양 고대 철학자들에 대한 일부 부정확한 이야기들까지 퍼져나가게 된 맥락도 유의해서 읽어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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