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김수영
홍기원 지음 l 삼인 l 2만2000원
오는 27일로 다가온 김수영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학술대회와 책 출간 등 기념 움직임이 활발하다. 12일 김수영기념사업회가 출범한 데 이어 17일부터 30일까지는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에서 14명의 화가가 참여한 기념 전시도 열린다. 20일 오전 10시에는 김수영연구회가 주관하는 학술대회가 줌으로 열려 염무웅 국립한국문학관장의 기조발제와 연구자들의 발표 및 토론이 이어진다. 홍기원 김수영문학관 운영위원장은 김수영의 생애를 64개 장소를 통해 들여다본 논픽션 <길 위의 김수영>을 내놓았고,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도 김수영의 시를 통해 그의 생애를 돌아보는 <김수영, 시로 쓴 자서전>을 이르면 이달 말 출간할 예정이다.
김수영의 생애에 관한 기록으로는 최하림 시인이 1981년에 ‘자유인의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했던 <김수영 평전>이 잘 알려져 있다. 김수영의 출생에서 죽음까지를 충실하게 정리해 놓아 김수영의 삶으로 들어가는 입문서로 긴요하다. 그러나 초판 출간으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났고 그 사이에 적잖은 자료가 새로 발굴되고 오해되었던 사실이 바로잡히는 등 후대 연구자들에게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박수연·오창은·서영인 등 연구자들과 작가들이 만주와 일본을 포함한 현장 답사를 거쳐 펴낸 책 <세계의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되리라>(2019)는 그런 작업의 일환이었다. <길 위의 김수영>은 <세계의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되리라>와 비슷하게 김수영이 거쳐간 장소들을 답사하고 가족과 문단 후배 등의 증언을 청취함으로써 그의 삶을 재구성한 김수영의 생애 지리지라 할 만하다. 지은이는 문학 전문가가 아님에도 김수영 문학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바탕에 깔고 꼼꼼한 현장 취재와 치밀한 자료 조사, 관련자들의 생생한 인터뷰를 종합해 입체적이며 흥미진진한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
오는 27일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김수영 시인의 삶의 장소 64곳을 답사한 생애 지리지 <길 위의 김수영>이 나왔다. 사진은 서울 도봉구 방학동 김수영공원 내에 있는 ‘푸른 하늘을’ 시비로, <길 위의 김수영>의 지은이 홍기원이 직접 찍은 것이다.
최하림이 <김수영 평전>의 최초 제목을 ‘자유인의 초상’으로 삼은 것은 매우 적실했다. 이때의 자유인이란 독립적 인간이라는 뜻으로 바꿔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자유롭고 넉넉한 형편이어서 자유인인 게 아니라, 자유와 자존을 방해하고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자유와 독립을 지향하고 추구하는 사람이 김수영이었다. <길 위의 김수영>에서는 김수영의 그런 특성을 이렇게 서술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지가 향하는 바였지 사회가 요구하는 바에 자신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선택이 중요했지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여 눈치 보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김수영은 자기 실존에 충실한 인간이었고, 자립한 근대인이었고 영원한 비제도권이었다.”
김수영의 이런 단독자적 면모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둘 있다. 해방 공간에서 그는 존경하는 임화가 주도한 좌익 문인 단체 조선문학가동맹에 관여하며 외신을 번역하고 남로당 정치 강의에도 열심히 출석했지만 정작 동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멋쟁이 모더니스트 박인환과 ‘명동 백작’ 이봉구 같은 이들도 가입했을 정도로 조선문학가동맹은 당시 문인들 사이의 대세였음에도 말이다.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박인환과 이봉구는 결국 동맹에서 탈퇴했지만, 임화를 비롯해 ‘절친’이었던 김병욱, 연극 스승이었던 안영일 등 가까운 이들이 대부분 월북했음에도 김수영은 좌익과 우익 사이에서 끝까지 중립을 지키다가 전쟁을 맞았다.
그와 김현경의 결혼 역시 지극히 김수영다웠다. 두 사람은 결혼식은커녕 결혼반지도 주고받지 않았고 가족 상견례도 없이 바로 동거에 들어갔다. 전쟁통에 김수영이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이에 김현경이 아들을 친정에 맡긴 채 김수영의 학교 선배이기도 했던 이종구와 같이 살았음에도, 수용소에서 돌아온 김수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김현경과 재결합했다. 요즘 기준으로 보아도 첨단이라 할 만한 결혼관을 김수영은 벌써 70여년 전에 몸소 실천한 것이다.
<길 위의 김수영>에는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고 관련자들의 증언을 청취해 김수영 생애사의 공백을 메꾸고 오류를 바로잡은 사례도 여럿 나온다. 김수영이 연희전문 영문과에 다녔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시기를 확인하지 못했는데 이 책에서 처음으로 김수영의 연희전문학교 학적부가 공개되었다. 이 학적부에는 김수영이 1945년 11월20일에 영문과에 입학해 이듬해 6월3일에 자원 퇴학한 것으로 나온다.
김수영의 연희전문 학적부. <길 위의 김수영> 지은이 홍기원이 유족의 가족관계증명서와 위임장을 받아 연세대로부터 발급받은 것으로, 김수영이 1945년 11월20일 연희전문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1946년 6월3일에 자원 퇴학한 것으로 나와 있다. 연세대학교 제공
김지하가 <창작과비평>을 통해 시로 등단하고자 원고를 보냈는데 백낙청(또는 염무웅)과 김수영의 감식을 거쳐 반려되었다는 <김수영 평전>과 <김지하 회고록> 등의 기록과 관련해서도 지은이는 백낙청과 염무웅을 직접 인터뷰해서 사실 관계를 바로잡는다. 이 책에 실린 백낙청의 증언에 따르면 대학 노트 한 권 분량 원고를 받아 자신이 먼저 읽고 김수영에게 검토 요청을 했는데, “이런 류의 토속적인 서정이 담긴 시를 아주 싫어”한 김수영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 견해를 존중해 백낙청 자신이 김지하를 만나 대학 노트를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김수영은 1968년 6월15일 광화문 술집 ‘발렌타인’에서 신동문, 이병주 등과 술을 마시고 한밤에 귀가하다가 버스에 치여 결국 이튿날 아침에 숨을 거두었다. 이날 술자리는 그가 싫어하던 이병주에게 줄곧 시비를 거는 등 좋지 않은 분위기에서 이어졌는데, 그로부터 불과 사흘 전인 6월12일 같은 집에서 언론인 홍사중과 누이 김수명과 함께 술을 마셨을 때에는 시종 분위기가 매우 유쾌했다고 홍사중은 기록하고 있다. 김수영의 마지막 장소라 할 이 술집에 관한 장을 지은이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어느 장소든 삶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삶의 끝, 죽음의 한 치 앞까지 몰리고서도 기적적으로 생환해 왔던 김수영도 그 장소가 주는 삶의 아이러니를 피해 가지 못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