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인된 정체성
계급, 인종, 대중운동, 정체성 정치 비판
아사드 하이더 지음, 권순욱 옮김 l 두번째테제 l 1만4000원
이른바 ‘정체성 정치’가 드러내는 문제를 비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여성, 흑인, 장애인 등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사회구성원들이 겪는 억압의 경험을 자칫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은 종종 “타인의 경험에 한가롭게도 무지하거나 무심한” 사람들로부터 엉성하지만 격렬한 형태로, 대개는 조롱의 형태를 띄고 발화되곤 한다. “계급이 우선”이라며 인종, 젠더, 장애, 연령, 국적 등 다양한 차원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모순들을 경제적 모순의 뒤로 미뤄놓는 좌파 일각의 태도 역시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는 불충분해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인 2018년 출간된 <오인된 정체성>은 정체성 정치의 문제를 진중한 태도로 뜯어보고 뼈아픈 비판을 제기해 주목을 받았다. 좌파 매체 <뷰포인트>를 창립한 편집자이자 언론인인 지은이 아사드 하이더는 인종 문제를 중심으로 정체성 정치의 본질적인 문제를 파헤친다. 파키스탄계 미국인으로 사회운동에 투신해 활동해온 지은이가 이 책에서 보여주는 최대의 미덕은, 맬컴 엑스, 휴이 뉴턴, ‘컴바히(컴비)강 공동체’(Combahee River Collective) 등 인종주의에 맞섰던 미국의 혁명적 흑인운동의 역사성을 천착하는 등 사회운동의 역동적인 비전을 오롯이 견지하면서 정체성 정치를 사려 깊게 비판한다는 점이다.
지은이는 “인종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했던 과거의 해방적인 대중운동과 다인종적 엘리트의 정치에 결부된 현대의 정체성 이데올로기 사이에 경계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정체성 정치는 1977년 미국 보스턴에서 결성된 흑인 레즈비언 단체 컴바히강공동체에 의해 처음 정치 담론으로 도입됐다. 이들은 ‘흑인 페미니스트 선언’에서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의 억압에 가로막힌 흑인 여성들의 정치적 실천을 위해 “우리는 가장 심오하며 어쩌면 가장 급진적인 정치가 다른 누군가의 억압을 끝내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정체성에서 나온다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지은이가 볼 때 이들의 주장과 오늘날 이데올로기가 된 정체성 정치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컴바히강공동체는 결코 “정치가 정치와 연관된 개인들의 구체적 정체성들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들이 무엇보다 집중했던 것은 고정된 정체성에서 비롯하는 권리가 아니라 “정치적 이론과 실천을 구축하고 정의할 권리”였으며, 그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연대’였다. “인종주의 없는 자본주의는 있을 수 없다”고 한 맬컴 엑스, 혁명적 민족주의와 반동적 민족주의 사이를 구분했던 휴이 뉴턴 역시 억압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한 대중의 정치적 실천을 핵심 과제로 삼았다.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작품 <바벨탑>(1563년).
그러나 오늘날 정체성 정치는 “정치를 공동체 참여가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자아로, 억압적인 사회구조에 대항하는 집단적 투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인정을 획득하는 것으로 환원했다. 그 결과 정체성 정치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비판하고자 추진했던 바로 그 규범들을 강화하고 만다.” 자유주의는 개인을 정치적 기초 단위로 삼는데,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가 말한 것처럼 그 속에서 “우리는 권력에 대한 예속화(subjection)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주체가 된다.” 이 때문에 사회구조의 변혁을 목표로 삼지 않고 정체성 자체만을 목표로 삼는 것은 그저 “사회구조로 포용되기를 요구하는 것”에 머문다. 게다가 그것은 정치적 행위성을 허구적인 “중간 계급”, 이를테면 “백인 남성 생계 부양자가 우두머리에 있는 핵가족”에 대한 소속 자격과 동일시하고 이에 견준 개인의 상처와 배제를 증명하는 데 집중한다. “이 피보호자의 지위 안에는 자율적 조직화를 통해 등장할 정체적 주체성도, 성공적인 정치적 행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연합이 필요로 하는 연대도 없다.”
만들어진 사회적 관계로서 인종주의는 실재하지만 인종이라는 것 자체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체성 정치는 ‘이데올로기적 미신’에 근거한다고 지은이는 비판한다. 잉글랜드인은 오랫동안 아일랜드인에게 인종적 억압을 가했지만 그것은 피부색에 근거하지 않았다. 1619년 영국령 버지니아주 식민법에는 ‘백인’이란 말 자체가 없었으며, 당시 처음 버지니아주에 온 아프리카인들은 아일랜드인 등 유럽인 노역자와 동일한 법적 범주 아래 ‘기간계약노역자’로 일했다. 이른바 ‘백인성’은 당시 지배계급이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유럽인 노역자들과 동맹을 맺고 아프리카인 노역자들을 노예로 만드는 과정에서 출현한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종주의를 기반으로 삼고 있는 사회구조, 그리고 그것을 새롭게 변혁하고자 하는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대중운동이다. 지은이는 “‘다중’ 사이에 의미 있는 공통의 이해관계는 어떻든 간에 기본값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분수를 약분하듯이 어느 인간 집단과 그들이 갖고 있는 다수성을 단일한 공통의 이해관계로 환원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공통의 이해관계는 다중을 하나의 집단으로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형성되며, 그 과정이 바로 정치적 실천이다. 지은이가 볼 때 정체성 정치는 이를 무마하고 기존 사회구조에 순응시키기 위한 지배 세력의 ‘중립화’ 기획이다. 영국 대처리즘부터 미국 트럼프 당선에 이르기까지,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은 “신사회운동과 생산 거점 조직 사이에 전략적 동맹이 일어날 가능성을 공격하는” 선제적인 역할을 했다. ‘법과 질서’로 강화된 국가 안에서 조직적인 대중운동은 약화됐고, 다양한 정체성 주장에서 비롯한 신사회운동은 일견 성공을 거둔 것 같지만 결국은 지배계급의 새로운 전략으로 도용됐을 뿐이다.
그렇다면 사회구조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억압들을 직시하면서도 이를 단지 개인의 권리 담론이나 계급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 정치적 기획은 무엇에 근거해 가능한가? 지은이는 정치철학자 마시밀리아노 톰바가 프랑스 인권 선언의 두 가지 판본을 비교한 작업에서 그 역사적 근거를 찾는다. 톰바는 ‘사법적 보편주의’에 근거해 “추상적인 권리 담지자”만을 전제했던 1789년 판본과 달리, 아이티 혁명, 여성의 정치 참여 요구, 식량과 생존에 대한 상퀼로트의 요구 등에 영향을 받은 1793년 판본은 정치·사회적 행위성에 초점을 둔 ‘반란자적 보편성’을 표명하고 있다고 봤다. 지은이는 “이미 존재하는 것에 관한 정의”에 불과한 각자의 추상적 권리가 아닌,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모두의 해방을 요구하는 정치적 행위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인종이나 계급과 같은 추상이 근원적인 우위를 지닌다는 부자연스러운 주장은 어느 한쪽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만큼이나 비생산적”이라며, “존재하는 것 너머를 사고하는 인민의 역량에 주목”하자고 제안한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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