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한미화의 어린이책 스테디셀러
크리스천 맥케이 하이디커 지음, 이원경 옮김 l 밝은미래(2020) 엄마는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해진다고 했지만 결국 이야기 중독자가 되었다. 딱히 나만 그런 건 아니다. 소설가 정세랑은 “읽는 사람은 죽기 전에 천 번을 산다”는 말을 좋아한다고 했다. 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달랑 한 번뿐인 내 인생 말고 천 번의 삶을 살아볼 수 있다. 어린이도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린이가 독자가 되려면 재미난 이야기가 담긴 책을 만나야 한다. 이야기가 살아 있으면 흡인력이 강하다. 책에 손이라도 달렸는지 독자를 잡고 놔주지 않는다. 책을 읽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집 안에 어둠이 내려와 있을 때 우리는 이야기에 사로잡힌 것이다. 한 세계에 깊게 몰입하는 경험을 해야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가 되는 법이다. <어린 여우를 위한 무서운 이야기>는 손에 잡으면 정신을 못 차리고 빠져들 만한 작품이다.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윗길로 치는 무서운 이야기다. 습지 동굴에 사는 늙은 이야기꾼 여우가 일곱 마리 어린 여우들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식 구성이다. 늙은 여우는 이야기가 한 대목 끝날 때마다 어린 여우들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들려줄 이야기는 정말 무섭단다. 집에 돌아갈 마지막 기회야!” 그때마다 온 신경이 곤두서서 이야기를 듣던 어린 여우들은 하나씩 엄마 품으로 도망을 친다. 그렇다면 왜 이야기꾼은 어린 여우들에게 공포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줄까. 인류가 이야기와 함께 살아온 비밀이 여기에 있다. 이야기를 통해 어린 여우들에게 앞으로 닥칠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지혜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무섭더라도 “끝까지 들을 만큼 용감하다면, 그 이야기는 세상의 좋은 모습을 밝혀주고 바른길로 인도하고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 줄 것이다. 주인공인 어린 여우 미아와 율리는 말도 못할 고통을 겪는다. 모험과 고난의 서사는 많고 많지만 두 여우의 시련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두 여우와 가장 가까운 피붙이가 가장 무서운 적으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미아는 스승과 동생들이 노란 악취에 취해 형제를 죽이려 덤벼드는 모습을 본다. 한 발이 자라지 않아 불구인 율리는 아버지와 누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느낀다. 베아트릭스 포터의 등장도 이야기를 더 무섭게 만드는 데 한몫한다. ‘피터 래빗’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는 덫을 놓아 동물을 잡고 그림을 그린 후 박제를 만드는데 이 모습이 섬뜩하다. 미아 역시 베아트릭스 포터에게 잡혀 죽을 뻔한다. 19~20세기 초의 현실을 반영했을 따름이지만 어린이 책을 여럿 쓴 작가에 대한 환상이 깨지며 더 괴이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이제 작품이 으스스하다는 건 충분히 짐작할 테다. 그거 말고 교훈은 없냐고? 이야기 자체가 메시지다. 두 어린 여우처럼 스스로 터득해 가며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교훈. 2020년 뉴베리 아너상 수상작. 초등 4~6년. 출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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