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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출판사와 서점이 있었을까?

등록 2021-11-12 04:59수정 2021-11-12 09:10

[한겨레Book] 강명관의 고금유사
황윤석은 1770년 1월21일 일기(<이재난고>)에 아주 흥미로운 소식 하나를 싣고 있다. 서울 동촌 연지동(蓮池洞)에 ‘서방(書坊)의 인역(印役)’이 있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인쇄업자 겸 출판업자가 책을 인쇄하는 일이 있었다는 말이다. 곧 당시 제법 유명한 양반이었던 박치륭(朴致隆)의 아들과 조덕준(趙德濬)의 아들이 여러 사람과 함께 각각 돈 10냥을 내어 먼저 철활자(鐵活字)로 과거 시험장에서 보기 편한, 아주 작은 사이즈의 사서삼경을 인쇄하고, 여력이 있으면 다른 책도 차차 인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철활자를 사용하여 여러 책을 찍겠다고 했으니, 당연히 출판사다. 금속활자를 사용하는 출판사의 존재는 정말 흥미롭다. 그런데 뒤에 이 출판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감감무소식이다. 목판이나 목활자로 품질이 낮은 책을 찍어 파는 소규모 인쇄업자는 19세기에 출현하지만, 금속활자를 이용해 고급스러운 책을 찍어 파는 출판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부터 24년 뒤인 1794년 11월22일 정조는 좌승지 심진현(沈晉賢)에게 <자치통감강목>을 상으로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심진현이 있다고 하자, 정조는 권질(卷帙)이 많은 책은 마땅히 둘 곳이 없고 또 책이 흩어질 염려가 있다고 하면서(<자치통감강목>이 거질의 책인 것을 의식해서 하는 말이다), 서울에 서점이 없는 것이 늘 아쉽다고 하였다. 서점이 있으면 필요할 때 가서 보면 된다는 말이다. 심진현은 이에 중국은 사정이 달라 서점이 시전(市廛)에 줄 지어 있어 책 구입도 쉽고 또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서점에 가서 빌려보면 된다고 말한다. 여기에 이어지는 말이 아주 흥미롭다. 서점을 설치하자는 여론이 있다는 것이다. 그 여론이란 서점을 설치해 책의 매매를 허락하고 이어 책쾌(冊儈, 서적 행상 겸 매매중개업자)를 붙박이로 앉혀서 시정을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면, 서점이 잘 될 것이라는 말이다.

간단한 것 같은데, 왜 이게 되지 않았을까? 심진현에 의하면 모두들 이렇게 바라기는 하지만, 나서서 주관하는 사람도, 자금도 없기 때문에 서점이 설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조는 그렇다면 심진현이 이 일을 주관하고, 규장각의 신하들이 상의해서 추진하라고 명한다. 자금도 필요하면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모두가 간절히 바라고, 왕까지 지원을 약속했으니, 서점이 설립되었던가? 3년 뒤인 1797년 정조는 심진현이 서점을 설립하려 했는데 정말 했는지를 묻는다. 정민시(鄭民始)가 아직 만들지 않았다고 하자, 옆에 있던 채제공이 거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어찌 서점을 하겠습니까? 책 한 질의 값이 돈 수십 꿰미를 넘으면 반드시 사지 않을 것입니다. 사정이 이런데 서점을 차려 어디다 쓰겠습니까?” 책값이 조금만 비싸도 사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점을 설립하자는 이야기는 이렇게 끝났다. 꼴을 갖춘 서점이 서울에 출현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가 되어서였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지난 6월 서울 인사동에서 나온 조선전기 금속활자 전시회를 연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다만 이 전시회를 계기로 제대로 된 출판사도 서점도 없던 조선시대 서적문화를 한번 되돌아보았으면 한다. 금속활자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어떤 책을 어떻게 찍어 어떻게 유통했는가 하는 문제도 더할 수 없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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