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1388년 7월 조준이 토지제도를 바로잡을 방책을 제시한 상소.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통일전쟁에서 여말선초까지
이정철 지음 l 역사비평사 l 2만8000원 시대마다 시대의 주된 모순이 있고, 이를 둘러싼 여러가지 힘들은 갖가지 작용 끝에 어떤 균형에 도달한다.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2010)을 통해 조선 시대 핵심 개혁 과제였던 대동법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현실과 부딪혔는지 추적했던 역사학자 이정철은 새 저작 <권력이동으로 보는 한국사>에서 ‘삼국통일전쟁에서 여말선초까지’ 한국사의 핵심 국면들 속에서 “개혁이 구체적 현실 속에서 어떤 과정과 어떤 충격을 통과하며 진행됐는지” 살핀다. 지은이는 극심한 권력이동이 벌어진 ‘전환기’를 중심으로 시기를 구분했다. ‘삼국의 생존 투쟁기’(642~676), ‘통일 왕국의 파편화’(780~889), ‘호족의 시대’(889~975), ‘원간섭기 고려 국왕들과 개혁’(1259~1356), ‘공민왕의 개혁과 조선의 건국’(1356~1392) 등이다. 지은이는 각 시기마다 당대를 구성하는 어떤 요소들이 불균형을 만들어내고, 어떤 과정을 거쳐 새로운 균형점에 도달했는지 분석했다. 삼국통일전쟁의 배경에는 초강대국 당나라의 등장이 있었다. 최초의 충격은 외부에서 왔지만, 이것이 내부화되는 과정은 삼국에서 각각 다르게 나타났다. “그것은 국제관계와 각국의 지배 권력 집단 내 단합 정도의 상호작용에 따라 주로 판가름 났다.” 세 나라 모두 외형적으로는 강력한 권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신라만이 “지배 집단 내부의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국가적 결집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달라진 시대는 또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혈연·지연·신분을 하나로 결합시킨 골품제는 지배 집단 내부의 갈등을 최소화하는 동력이었지만, 통일 이후에는 되레 사회를 파편화하는 힘이 됐다. 이에 대한 개혁을 이루지 못한 신라는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잃고 결국 새로운 사회 세력인 호족에 권력을 넘겨준다. 14세기 고려가 당면했던 두 가지 국가적 과제는 원나라의 정치적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과 민생을 안정시키는 사회경제적 개혁이었다. 권력층이 무단으로 확대해 누려온 토지와 노비에 대한 이익을 국가가 환수하는 것이 사회경제적 개혁의 핵심이었다. 공민왕 등 모든 왕들이 이에 실패했고, 끝내 “사회경제적 적폐를 해결하는 과정이 새로운 왕조(조선)의 창업 과정이 됐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특히 그는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의 추천으로 사헌부 대사헌에 올라 사사로운 수조권을 박탈하는 사전(私田) 개혁을 추진한 조준(1346~1405) 등 두 비주류 세력의 만남에 주목했다. 극심한 사회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어떤 가치가 사람들의 실제 행동과 결합할 때 비로소 역사는 움직인다는 것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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