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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철학의 지형도 펼쳐주는 ‘키케로 전집’

등록 2021-11-05 05:00수정 2021-11-05 10:43

[한겨레Book]
정암학당 번역 ‘키케로 전집’
‘진리는 파악될 수 있나’ 다룬
‘아카데미아 학파’로 시작해
4년 동안 전 13권 출간 계획

키케로가 로마 원로원 의원들을 상대로 카틸리나의 내란 음모에 대한 신속한 대책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는 모습을 담은, 체사레 마카리가 그린 프레스코화(1888년).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키케로가 로마 원로원 의원들을 상대로 카틸리나의 내란 음모에 대한 신속한 대책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는 모습을 담은, 체사레 마카리가 그린 프레스코화(1888년).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아카데미아 학파
키케로 지음, 양호영 옮김 l 아카넷 l 1만8000원

서양 고대 철학 가운데에서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기원전 323년) 이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멸망(기원전 31년)하기까지 지속된 ‘헬레니즘’ 시기의 철학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충분한 연구가 진행되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아카데미아 학파, 소요 학파,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등 다양한 철학 사조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앞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저작을 풍부하게 남긴 고전 시기에 견줘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사료가 부족한 탓이다. 이 시기에 대한 연구에서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것이 바로 로마 공화정 시기의 정치가이자 변호사로서 풍부한 라틴어 문헌 자료를 남긴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기원전 106년~기원전 43년)다.

플라톤 전집 등 서양 고전을 연구하고 번역하는 연구공동체 정암학당이 ‘키케로 전집’ 출간을 밝히고, 그 첫 책으로 <아카데미아 학파>를 펴냈다. <의무론> <노년에 관하여> 등 키케로의 유명 저작들은 국내에서 꽤 출간된 바 있지만, 서양 고전 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그의 철학 저술들을 전집으로 펴내는 것은 새로운 차원의 시도다. 이번 <아카데미아 학파>를 시작으로 <토피카>(성중모 옮김), <스토아 철학의 역설>(이기백), <투스쿨룸 대화>(김남우), <의무론>(임성진), <우정론>(김남우), <노년론>(김남우), <법률론>(성중모), <운명론>(이상인), <국가론>(임성진), <발견론>(김기영), <최고선악론>(양호영), <연설가에 대하여>(이선주) 등 전체 13권이다. 이 가운데 <아카데미아 학파>, <스토아 철학의 역설>, <운명론>, <발견론>은 국내 초역이기도 하다.

키케로는 어린 시절부터 ‘희랍’(그리스) 주요 철학 학파에 속한 철학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특히 회의주의를 앞세운 신아카데미아 학파의 수장이었던 필론으로부터 배운 철학을 자신의 토대로 삼았다. 변호사와 정치가로 활발히 활동했던 그는 말년을 포함해 정치적으로 좌절을 맛본 두 차례의 시기에 특히 철학 저술에 매달렸고,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라틴어로 옮기는 등 희랍 철학을 ‘로마화’하는 데에도 큰 관심을 두었다. 그가 살았던 “로마가 지중해를 제패하던 헬레니즘 후기는 학설 자체의 독창성보다는 기존의 철학들의 창조적인 이종교배가 요구되던 시기”(작품 해설)였다. 게다가 회의주의에 입각한 그는 저작 속에서 짧은 문답식 대화가 아니라 “하나의 논점에 대해 찬반 양측의 대화자가 각자의 입장 및 이를 뒷받침하는 학설들을 체계적이고 일방적으로 연설하는 방식”(perpetua oratio)의 철학적 대화편을 구사했다. 이런 여러가지 특징들로 말미암아 그의 저작들은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헬레니즘 철학이 어땠는지 보여주는 한편 희랍 철학이 로마로 이어지는 과정까지 드러내는 귀중한 사료가 된다.

<아카데미아 학파>는 키케로 말년의 철학 저작들 가운데 남아 있는 것으론 가장 이른 시기에 집필된 작품이다. 이 책은 두 번의 출간 과정을 거쳤는데, 오늘날엔 초판 전체와 재판의 일부가 전해진다. 주된 내용은 스토아 학파와 신아카데미아 학파 사이에 벌어지는 인식론 논쟁, 곧 ‘진리는 파악 가능한가’에 대한 논쟁이다. 소크라테스는 한갖 의견과 구분되는 참된 앎을 찾고자 했는데, 헬레니즘 시기에 이르러 여러 철학 사조들은 참된 앎을 가능케 하는 척도의 존재 유무까지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다.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로 꼽히는 제논은 기본적으로 감각을 앎의 근원으로 신뢰하면서도 여기에 정신의 역할까지 덧붙이는 경험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외부의 대상은 감각을 통해 ‘인상’을 찍어내는데, 이성적 동물은 이를 능동적으로 ‘동의’하는 정신의 판단 과정에 따라 참된 것을 ‘파악’(카탈렙시스)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 아카데미아의 회의주의를 주도한 아르케실라오스는 이에 대해 “참된 인상이 거짓 인상과 같은 종류의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며 반박했다. 감각은 불확실하고 동의는 주관적이므로 ‘파악’을 기각하고 ‘동의 중지’ 하는 것이 현자가 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태도라는 주장이다. <아카데미아 학파>는 이 팽팽한 논쟁을 신아카데미아 학파의 대변인 키케로와 스토아 학파의 대변인들의 입을 통해 상세하게 재현한다. 또 온건한 회의주의 입장을 견지한 필론과 절충주의적 태도를 취한 안티오코스 사이의 대립 등 소크라테스의 정신에 입각해 설립된 아카데미아의 정통성을 놓고 벌어졌던 철학사에 대한 논쟁의 역사와 맥락도 드러내어 준다.

이탈리아 카피톨리니 미술관에 소장된 키케로의 두상.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탈리아 카피톨리니 미술관에 소장된 키케로의 두상.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키케로 연구와 강독의 역사는 어언 10여년을 넘겼고 전집 번역에 대한 논의도 꽤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2019년 정암학당 키케로 번역팀이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으면서부터 번역과 출간이 획기적으로 진척될 수 있었다고 한다. 내년에는 네 권을 추가로 펴낼 계획이며, 앞으로 4~5년 안에 13권까지 완간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 <아카데미아 학파>를 번역한 양호영 정암학당 연구원은 “원전 유실 등의 이유로 헬레니즘 시기와 로마 시기의 철학에 대해 그동안 연구가 그리 활성화되지 못했는데, 키케로 전집 출간을 계기로 희랍 철학이 로마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연구 등을 촉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번 철학적 저작들의 출간은 역사, 법률, 수사학, 정치철학 등에서 주로 진행되어온 키케로 연구의 심도를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내놓았다. 양 연구원은 “헬레니즘 시기의 철학은 개인적인데다 윤리를 주된 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에 고전 시기 철학에 견줘 근현대 철학과 직접 맞닿는 부분이 많고 , 그만큼 대중에게도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다”고도 말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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