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창간해 우리 사회에 낯설었던 생태주의의 지평을 선구적으로 열어온 격월간 잡지 <녹색평론>이 창간 30돌 기념호를 내고 1년 동안 동면에 들어간다.
<녹색평론>은 지난 2일 누리집을 통해 “사회적 분열과 생태계의 파손이 극에 이르고 <녹색평론>이 더욱 목소리를 높여야 할 이때에 1년간 휴간 소식을 알려드리게 됐다”며 “보다 충실하고 의미 있는 작업을 안정적으로 지속해나가기 위한 준비와 모색의 시간으로 헤아려달라”고 밝혔다.
<녹색평론>은 창간 뒤 단 한번의 결호도 없이 격월로 발행했고, 최근에는 창간 30돌을 기념하는 181호까지 발행했다. 지난해 <녹색평론> 그 자체나 다름없던 고 김종철 발행인 겸 편집인이 작고한 뒤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으나, 더 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잠시 쉬어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김정현 <녹색평론> 발행인 겸 편집인(이하 발행인)은 4일 통화에서 “종이 매체 쇠락으로 인한 독자 이탈과 재정적 어려움 등을 이유로 이전부터 고민해왔던 일인데, 부친(고 김종철 발행인)께서 작고하신 뒤 편집실 인력 부족 등 내부 어려움이 더욱 커졌다. 창간 30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왔으나, <녹색평론>의 가치를 장기적으로 이어가기 위해선 정리를 위한 과감한 휴간 조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휴간 이후 재개될 잡지의 새로운 형식과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정해진 바가 없다”고 했다. 이전부터 내부에서 계간 또는 반년간 잡지로의 전환, 온라인 매체로의 전환 등 변화에 대한 논의가 없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녹녹찮은 환경 탓에 어떤 방향으로도 쉽게 나아가기 어려워, 1년 동안 잡지를 쉬면서 고민할 시간을 벌기로 한 것이다. 정기구독자 규모는 나날이 줄어들어, 현재 4천여명 수준에 이른다 했다.
지난 2019년 4월 문학론집 <대지의 상상력>을 내고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난 김종철 발행인.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잡지는 휴간하지만 행본 발간은 계속한다. <녹색평론> 과월호 선집, 김종철 미발간 원고 정리 등의 작업도 이어갈 계획이다. 정기구독자와 후원회원들에게는 잡지 대신 편지나 짧은 간행물 등으로 지속적으로 소식을 전할 계획이다.
다른 잡지와 달리 <녹색평론>은 이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독자 모임들이 활성화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걱정도 뒤따른다. 김 발행인은 “1년 동안 잡지가 안 나와 모임 자체가 끊기면 안되니, 두 달에 한 번씩 편집실에서 단행본이나 각종 매체에 실린 글들 가운데 읽고 이야기 나누기 좋은 것들을 추려 제안을 드리는 것은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휴간은 <녹색평론>의 지속가능성을 판가름하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김 발행인은 “<녹색평론>과 그 가치에 우호적이지만 그동안 구독이나 참여를 하지 못하신 분들을 새롭게 모셔올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밝혔다. 되도록 광고나 외부 지원 없이, 오직 독자와 후원회원의 힘으로 운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기후변화에 대한 논의가 유행처럼 쏟아지고 있지만, <녹색평론>은 그것은 표면으로 드러난 현상일 뿐 더 근본적인 것은 ‘문명’의 문제라는 것을 창간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주창해왔다. 김 발행인은 “<녹색평론>만의 이러한 가치를 인정하는 독자들이 존재하고 또 그들과 소통할 수 있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잡지를 이어나가겠다는 방향을 굳혔다”고 말했다.
<녹색평론>은 창간 30년을 기념하는 181호에 고 김종철 발행인의 창간사와 함께 <녹색평론>의 역사에서 특기할 만한 시점에 발표되었던 그의 권두언들을 추려서 담았다. 이에 대해 김 발행인은 “10년, 20년, 심지어 30년 전 김종철 발행인의 발언이 오늘의 상황에도 놀랄 만큼 긴요하고 적실해서이기도 하지만, <녹색평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재차 확인하고 다짐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 <녹색평론> 창간 당시 ‘잘 안 될 것’이라고 만류하던 사람들에게 부친이 하곤 했던, “이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말을 다시금 새겨본다고 말했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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