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 1호
지식의 사회, 사회의 지식
기획위원 김영욱·박동수·박민아·최화선 l 읻다 l 2만원
“탄탄한 학술 연구에 토대를 두고 자신만의 글을 쓸 수 있는 저자를 찾기 힘들다”, “꼭 소개하고 싶은 외서들이 있는데 걸맞은 번역자를 찾기 어렵다”, “단기 업적에 대한 압박 등으로 학자들이 정작 책을 쓰지 못한다”…. 한국 ‘학술 출판’에 대한 이런 지적들은 어제오늘의 것이 아니다. 단행본 학술서의 출판 규모가 500부 수준으로까지 내려앉았을 정도로, 학계와 대중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무너져내리고 있다. 무엇보다 학계와 대중 사이에 마땅히 존재해야 할 지적·사회적 공론장의 상실이 핵심 문제로 꼽힌다.
최근 “시대와 분과를 가로지르는 지식의 교차로”를 표방하는 ‘서평 무크지’ <교차>가 첫 호를 선보였다. 서평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잡지마저 뜸해진 시대에, 학술지 논문에 버금가는 분량과 깊이, 호흡을 지닌 서평들을 담은 묵직한 서평지가 출간된 것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사라져가는 지식 공론장을 재건하기 위해 학술 출판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여전히 있고, 또 이를 시도하고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도 함께 전해준다. 지난 26일 <교차>를 만든 출판사 읻다의 김현우 대표(이하 김)와 남수빈 편집자(이하 남)를 만나 서평지 기획 배경과 취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2015년 창업한 읻다는 나쓰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등의 서간집 시리즈(‘상응’) 등 그동안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고전이나 재조명할 가치가 있는 텍스트를 발굴해 번역 출간”하는 데 집중해왔다. 여태까지 출간한 29종이 모두 외서다. 물론 “각 분야 최신의 연구들이 국내 지식계에선 어디까지 진척됐는지 보여주는 국내서를 내고 싶은”(남) 욕심이 없던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 “딱 맞는 국내 필자를 찾아내고 호흡을 맞춰볼 수 있는”(김)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서평지 기획이다. 서평을 통해 국내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성과를 발굴해 대중과 연결하고, 장기적으로 이를 단행본으로까지 발전시킨다는 전략인 셈이다.
‘지식의 교차로’를 표방하는 서평지 <교차> 1호를 펴낸 출판사 읻다의 김현우(왼쪽) 대표와 남수빈 편집자가 지난 26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교차>를 소개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그동안 학술 성격의 외서들을 펴내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역자 섭외였다고 한다. 해당 분야 국내 연구자가 가장 맞춤하지만, “번역서가 (대학 등에서) 성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환경 아래에 선뜻 작업에 나서기 어려운”(김) 현실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미 원저를 읽고 공부한 연구자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분명 꾸준히 공부하고 최신의 이론들을 소화하는 연구자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데, 과연 그 성과는 어디에서 유통되고 있는가, 누가 그들의 연구에 관심을 갖고 귀 기울여주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김) 이로부터 “아예 번역보다는 부담이 덜한 서평을 의뢰하고, 이를 출간해 국내 연구자들의 문제의식이나 연구 성과를 알려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서평자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분량은 200자 원고지 80~120매 정도로 정했다.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기에, 한 해 두 차례 발행하고 원고 청탁은 6개월 전에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교차>는 책이 아닌 서평자에게 무게를 싣는다. 원고를 청탁할 때 아예 “책 자체보다는 서평자의 이름이 남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단지 책을 소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 연구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비평적으로 다루는지, 그것을 어떻게 자기 연구의 자산으로 삼고 다른 작업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드러내어, 이 정도 소화할 수 있는 연구자, 작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남)는 것이다. 1호 ‘지식의 사회, 사회의 지식’의 첫머리를 장식한, 장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대한 불문학자 김영욱의 서평은 이런 지향점을 잘 보여주는 서평으로 꼽을 만하다. “지성과 사회의 변증법의 역사적 전개가 억압과 착취일 수밖에 없다”는 루소의 비관주의를 읽어낸 서평자는, 현재를 사는 연구자로서 이론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낙관적인 일치만을 추구할 수 없는 역설의 지점을 고민한다. 사회학자 김건우는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의 사회>에 대한 서평을, 자신을 관찰하고 기술해야 하는 근대사회가 제기하는 과제를 점검하는 한 편의 사회학 논문처럼 썼다. <교차>라는 새로운 장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지식 생산과 유통의 가능성도 함께 열린 셈이다.
매호 ‘주제 서평’에 아직 국내 번역되지 않은 외서를 20%가량 넣기로 한 것도 특별하다. 주독자층이 연구자·편집자일 거란 점을 감안해, ‘담론의 장’을 더 넓히고 강화해보자는 취지다. 창간호에서는 18세기 유럽 공론장의 역사를 다룬 <살롱의 세계>(2005), 중세 후기 유럽에서 여성이 주도한 돌봄과 의술의 역사를 다룬 <젠더, 건강, 치유 1250~1550>(2020), 브뤼노 라투르의 미번역 핵심 저작인 <사회적인 것의 재구성>(2005)에 대한 서평들을 실었다. 시장성의 문제로 국내 번역이 안 될 수 있는 책들이라, “다른 출판사에서라도 꼭 출간해줬으면 좋겠다”(남)는 바람도 담았다.
기획위원 4명이 <교차>를 함께 만든다. 1호 서평자로도 참여한 불문학자 김영욱을 비롯해, 철학책 편집자 박동수, 과학사 연구자 박민아, 종교학자 최화선 등이다. 지난 1년 반 동안 이들과 여러 차례 기획회의를 거치며 ‘지식의 사회성’을 대략적인 창간호 주제로 삼았고, 염두에 둔 서평자가 있는 책 20~30권을 후보로 올려놓고 추려가는 방식으로 ‘지식의 사회, 사회의 지식’이라는 세부 주제를 다듬어나갔다고 한다. 전체 주제와 서평 대상이 되는 책, 그리고 서평자의 문제의식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2호에선 ‘물질’을 주제로 삼았고, 이를 위한 서평 청탁도 대부분 마친 상황이라고 한다.
김현우 읻다 대표는 <교차>가 “출판계 안에서 넓은 의미의 연대, 협업 등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남수빈 읻다 편집자는 “단지 책을 소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 연구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비평적으로 다루는지, 그것을 어떻게 자기 연구의 자산으로 삼고 다른 작업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드러내어, 이 정도 소화할 수 있는 연구자, 작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작은 규모의 출판사에서 이런 서평지를 만드는 데 어려움이 많지 않을까? <교차>는 6호까지만 발행할 예정이다. 한 호에 대략 500만~700만원 정도의 손해를 볼 각오로 시작했다고 하니, 6호까지면 전체 3000만~4000만원 정도의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훌륭한 국내 필자를 발굴할 수 있다면 투자해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김)고 한다. 크라우드 펀딩에 216명이 참여해 도움을 주었는데, 이 가운데 20~30%가 아직 나오지도 않은 책을 6호까지 받아보겠다고 후원했다. “학술지에 실리는 밀도 있고 수준 있고 분량 있는 서평을 한자리에 모아서 보고 싶어 하는 분들이 꽤 많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남)고 한다.
“연구자들과 독자들의 수준은 선형적으로 발전하면 발전했지, 퇴보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그러나 한국어로 되어 있는 학술장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으면 그 성과들은 보여지지 않은 채 사라져버릴 겁니다.”(김) 결국 <교차>는 이런 상황에서 출판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묻는 기획이다. 두 사람은 <교차>를 만드는 과정에 학술계·출판계 모두에 많은 자원이 잠재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고 입을 모았다. 비공식적인 연구자들의 네트워크가 서평자 발굴에 적극 협조해주었고, 꾸준히 논문을 읽으며 최신의 연구 경향과 국내 연구자 동향을 파악해온 출판인들이 알찬 도움을 줬다고 한다. 김 대표는 “학술장 자체에 대해서는 정책적인 측면이 많아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출판계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출판계가 놓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쌓여 있는 기반이 있고 그 위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시도해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교차>가 “출판계 안에서 넓은 의미의 연대, 협업 등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읻다는 나름의 방식으로 <교차>라는 시도를 하지만, 다른 출판사들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지식과 대중을 잇는 공론장을 부흥시키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내놓을 것이라는 기대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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